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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창

방송이라는 창을 통해 사람을 보고,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by 최국만


공장에서 시작된 나의 삶은

방송이라는 창을 통해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다.


스물여덟, 나는 KBS에 입사했다.

그리고 서른두 해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그 사이 결혼을 했고, 아이 셋을 낳았고,

아버지가 되었고, 가장이 되었고, 결국 한 사람의 ‘나’로 익어갔다.


KBS는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내 인생 그 자체였다.


그 전에 나는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20여 군데 공장을 전전했다.

철공소, 목공소, 건설현장, 보세공장, 주물공장, 얼음공장, 레코드 세일즈맨,

신문광고 판매, 통관업무…

이름조차 낯선 일들을 10대의 어린 몸으로 겪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열일곱.

삶이라는 말보다 ‘버텨낸다’는 말이 더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노동법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고,

하루하루가 생존이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다.

내일을 기대하는 것보다

지금의 땀이 마르기 전에 또 흘려야 하는 하루였으니까.


그런 시간들 끝에

나는 마침내 마이크를 잡았고,

카메라 뒤에 섰고,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며

‘세상’을 찍기 시작했다.


KBS는 나에게

월급을 주는 직장이 아니라

삶을 통찰하는 창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밀렵의 현장을 목격했고,

석면의 공포를 마주했고,

반달곰의 울음과,

가짜 유학생의 서류 속 위선과,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약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세상은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진실은 현장에 있고, 사람의 눈빛 속에 있고,

침묵하는 곳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한 번도 가볍게 받아들인 적이 없다.

나는 방송인이었지만,

어쩌면 증언자였고,

기록자였고,

어느 날은 눈물 삼키는 목격자였다.


그렇게 32년을 보냈고,

퇴직 후 나는 다시 내 삶을 돌아보며

이 모든 순간을 글로 다시 부르고 있다.


가장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으로서,

가장 깊은 고통을 본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도 세상을 향해 묻고, 쓰고,

어디선가 누군가 살아가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려 한다.


나는 지금도 KBS를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곳은 내게

가족을 꾸릴 수 있는 삶의 기반이었고,

사람을 바로 보게 한 창이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학교였다.


내가 걸어온 길은

누구보다 거칠었지만,

그래서 누구보다 선명한 시선과 따뜻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제 나는

세상을 향한 그 창을

글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계속 열어두려 한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되뇐다.


“내 삶은,

나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시선과,

누군가의 고통과,

그리고 그 모든 걸 품어준

한 직장,

KBS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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