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많고,호기심은 줄어들어 가는 노년의 미학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KBS에 입사해 30년 넘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만들며
세상의 부조리와 약자의 아픔을 기록했다.
카메라 뒤에서 울던 밤도 많았다.
그런 시간이 쌓여 어느새 나는
한 사람의 기록자이자 증언자, 그리고 삶의 구경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멈추지 않았고,
퇴직이라는 문턱은 생각보다 조용히 내 앞에 다가왔다.
처음엔 허전했다.
매일 울리던 전화가 멈추고,
급박한 방송 일정도, 새벽의 취재 차도, 더 이상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귀촌을 결심한 건
삶을 느리게, 그러나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괴산의 산과 바람, 그리고 이웃들의 소박한 인사 속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단어들을 되찾았다.
“고마움, 기다림, 겸손, 그리고 사랑.”
삶의 속도가 느려지자
비로소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얼마나 빠르고 치열했는지도 보였다.
그 곁엔 언제나 아내가 있었다.
젊은 날, 내 꿈의 뒤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키우고,
암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사람.
지금도 나는 새벽마다
그녀가 끓여주는 따뜻한 밥 한 공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 한 끼는 은퇴자의 식사이자, 인생의 감사문이다.
이제 나는 방송 대신 글로 세상을 기록한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된 시작이었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사람을 배우고, 자연을 배우고,
그리고 함께 늙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이 <은퇴자의 삶>은
그 배움의 여정이자, 또 다른 나의 일기이다.
젊은 날엔 ‘세상’을 바꾸려 했다면,
지금은 ‘나’를 조금씩 다듬으며 세상과 화해하고 싶다.
이제 나는 하루의 끝이 아닌,
또 하나의 ‘시작’을 쓰려 한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그리고 이 삶을 계속 써 내려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