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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01. 2019

죄책감이 다르게 발현하는 지점

영화 <살아남은 아이> 기현의 고백 

*본 리뷰는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영화를 먼저 감상하시고 이 리뷰를 읽으셨으면 해요. 영화가 의도했던 진실이 밝혀지는 서사와 용서의 곤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2018년의 수작으로 뽑히는 한국 독립영화입니다. 서울독립영화제 ‘최우수장편상’, 국제비평가협회의 ‘국제영화평론가협회(FIPRESCI)상’, 우디네극동영화제 ‘화이트 멀베리상’을 비롯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신인감독 포럼에 공식초청 받는 등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았습니다. 친구를 구해내다 강물에 빠져 죽은 아들 은찬의 부모가 아들이 살려낸 기현과 만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한 <살아남은 아이>는 모든 훌륭한 영화가 그렇듯, 인생의 미묘하면서 무거운 문제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감독은 이 영화가 애도와 용서를 주제로 한 영화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을 섬세하게 구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또 다른 화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것은 바로 살아남은 아이 기현의 ‘죄책감’입니다.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절망뿐인 일상에서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모습들



 성철(최무성 역)과 미숙(김여진 역)은 하나뿐인 아들 은찬을 잃었습니다. 강에 빠진 친구를 구하면서 죽은 은찬은 의사자로 선정이 되지만, 상패와 상장은 남은 부모에게 위로도 영광도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웃을 수 있게 된 건 아들이 살려낸 친구 기현(성유빈 역)과 가까워지면서였습니다. 아들의 목숨과 바뀐 기현의 존재를 받아들이기가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지만, 기현에게 애정을 주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삶을 서서히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생각하자면, 아들에게 미처 주지 못한 애정을 줄 수 있는 다른 존재, 기현을 만나게 되면서 애도가 가능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들이 품게 된 생의 희망은 곧 깨어지고 마는데, 바로 이들의 사랑을 받는 기현의 마음에 균열이 일면서부터 입니다. 균열은 기현의 죄책감에서 시작됩니다. 은찬의 부모로부터 조건 없는 따뜻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기현은 자신의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은 기현을 계속해서 괴롭히고 돌이킬 수 없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결국 진실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그는 거짓 위에 세워진 평화의 성에서 죄책감을 숨기고 행복해지기보다, 끔찍한 진실을 고하고 자신의 죄값을 치루려고 합니다. 진실을 은폐하고 위장했던 당사자가, 어째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진실의 증언자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증언을 둘러싼 복잡미묘한 문제들에 맞닿아 있습니다. 기현은 은찬을 죽인 가해자입니다. 피해자인 은찬은 영영 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가해의 공범들은 위증을 공모합니다. 그리고 진실은 너무나 쉽게 간단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는 한, 이 진실이 건져 올려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렇게 사라질 뻔한 진실이, 진실의 은폐를 시도했던 당사자의 증언으로 알려지게 되는 거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유태인 생존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 다른 사람들의 회고록을 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차츰차츰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또 다른 하늘 아래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노예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온 솔제니친도 그 점에 주목했다. 
 "장기 복역자들, 생존자이기 때문에 당신들이 축하하는 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프리두르키pridurki거나 수감생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프리두르키였다. 왜냐하면 라거는 절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다른 수용소 세계의 언어에서 프리두르키는 어떤 식으로든 특권의 지위를 획득한 포로들로, 우리 쪽에서는 프로미넨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행운의 손길을 받은 우리는 크든 작든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정확히 말해 가라앉은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제3자를 대신한’ 이야기,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들이 아니라 가까이서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후의 말살, 그 완결된 작업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가라앉은 사람들은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죽기 수주, 또는 수개월 전에 그들은 이미 관찰하고, 기억하고, 가늠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들 대신, 대리인으로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이소영 역, 돌베개, 2014, p.98-99



 프리모 레비는 ‘구조된 자’들이 증언해야 할 진실에 있어 엄밀한 의미에서 ‘제3자’라고 말합니다. 운좋게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 그들은 말해져야 할 죽음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사람들입니다. 정작 그 죽음을 체험한 이들은 죽음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은 자’들만이 죽음의 진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는데 말이죠. ‘구조된 자’들은, 진실의, ‘가라앉은 자’가 해야 했던 증언의 대리인일 뿐입니다. 문제는 대리인 증언의 객관성과 타당성 보다도 우선 이들의 증언에의 의지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조된 자들은 말해야 할 이유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수치심 또는 죄책감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만 죽음에서 살아남았다는 수치심, 자신의 생존이 나머지 이들의 죽음을 담보로 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또는 타인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 다른 이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같은, 미묘한 감정들이 그것입니다. 이런 감정은 자신으로 향하기 때문에 진실을 숨기고 증언을 거부하게끔 만듭니다. 



서사와 연출의 탁월함 만큼이나 최무성, 김여진, 성유빈 배우의 훌륭한 연기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몫을 한다. 특히 그 눈빛, 눈빛, 눈빛..




 그러나 기현은 이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것도 자신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사랑받길 원했던 이에게 말입니다. 그들이 진실을 알면 무너질 것을 알면서, 자신과 그들의 관계가 파괴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증언합니다. 증언에의 의지는 한 인간이 완전히 변모해야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기현의 고백이 순전히 이기심에서 비롯된 거라고도 말하더군요. 그러나 만약 기현이 단순히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진실을 폭로했다면, 자신의 목을 조르도록 성철의 팔을 잡아 끌지 않았겠죠. 강물에 빠져 죽기 위해 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기현은 달라졌습니다. 은찬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폐시켰던 과거의 기현과는 다릅니다. 기현의 행동이 절대 용서될 수 없는 죄인 것만큼 그의 변화도 저에게는 분명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누군가 용기를 내서 말하지 않으면 밝혀지지 않는 진실이 있습니다.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고통받은 피해자가 위험을 무릅쓰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피해자가 없는 경우, 간접적인 피해자, 제 3자 혹은 가해자의 입을 통해서 겨우 그 진실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들이 증언하게끔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랑하려는 자와 사랑이 필요했던 아이, 용서받으려는 아이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뒤섞일 때, 죽이고 죽고, 살리고 살리려 하는 마음이 엉켜 허우적거리는 광경을 보며 온 몸이 몹시 쓰라렸습니다. 과연 사해질 수 있는 죄는 있을까, 인간의 용서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이런 질문과 함께 이 모든 파국을 예상했으면서 증언하게끔 추동한 힘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죄를 숨기려는 비겁함에서 죄를 고백하는 용기로 바꾸는 죄책감의 스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저는 끝까지 그 스위치를 찾고 싶습니다. 이 세계의 가라앉는 진실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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