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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10. 2019

무용한 귀여움의 왕국

교토-오사카 여행 이야기 (6)

 “어쩜 이럴 수 있죠?”

 

 일본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감탄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바로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신경 쓴 부분에 대해서요. 일본만큼 디테일에 강한 문화가 또 있을까요? 여백과 간결함이 일본 문화의 한 축이라면, 정교함과 섬세함은 또 다른 축인 듯 해요. 특히 작고 귀여운 것에 정교함과 섬세함이 결합되면 결과는 어마어마 합니다. 젓가락 받침대나 컵 손잡이, 손톱만한 과자나 알사탕에마저 새겨진 캐릭터 얼굴을 보고 있자면 일본은 귀여움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민족이 아닌가 혀를 내두르게 돼요. 저는 이를 무용한 귀여움이라 말하곤 합니다. 마음의 순간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외엔 꼭 가져야 할 이유는 없는 귀여움 말이예요.

 

 무용과 유용의 판단은 쓸모에 기준합니다. 어딘가에 쓰임새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물의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믿음이 은밀하게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로 모든 존재에는 저마다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명제입니다. 물론 모든 사물은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펜도, 의자도, 망치도 그 기능에 따라 인간에게 사용되죠. 그러나 정말 목적에 부응하는 것만이 사물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일에도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쓸모 없는 인간일까요?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평가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가능한 것일까요? 


 

일본 어느 곳에서든 피할 수 없는 귀여움들!





 무용하다는 말은 저에게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김희성(변요한 역)이 떠오르게 합니다.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침략과 지배를 노리는 뒤숭숭한 조선 말, 남녀주인공들은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켜나가는데 김희성만은 천하태평합니다. 부모님의 재력을 믿고 목적 없는 유학생활 후엔 놀음판에 빠져들고, 삶의 어떤 목적도 꿈도 없죠.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다는 그에게 비난이 쏟아질 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김희성이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 그건 곧 그의 삶이 지향하고 추구하는 가치와도 같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에 수렴하며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거부합니다. 쓸모와 유용성에 부응하는 존재이기보다 그 압박스런 기준들을 빗겨나 자신 그 자체로 존재하겠다는 태도겠지요. 김희성이 대의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해나가는 인물들 속에서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카르페디엠’, 즉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매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을 중시하죠. 우리는 그를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인 관념에 기대면 그를 비난하는 건 쉽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한번 더 삐딱하게 서서 그 관념이 당연하다는 것을 설명해보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더듬지 않고 그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요? 

     

 무용하다는 말은 또한 제가 좋아하는 김연수 작가의 어느 구절로 저를 데려갑니다. 김연수 작가는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는 소설의 구절들과 시를 모아 산문집 <우리가 보낸 순간>을 엮었습니다. 거기에서 작가는 시를 우리가 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으로 설명하죠. 

 

시를 읽는 즐거움은 오로지 무용하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루 중 얼마간을 그런 시간으로 할애하면 내 인생은 약간 고귀해진다. (...)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날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순수한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마음산책, 2010. p.287-288

 

 목적과 효용을 강조하는 이 시대에 무용한 것들은 말 그대로 무용한 것으로 취급되곤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역으로 그 무용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우리가 무용해질 때 역설적이게도 가장 순수한 존재 그 자체가 됩니다. 다른 기준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온전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문학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시는 종종 가장 무력하고 무용한 장르로 말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순수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외적 조건의 규약에서 벗어나 한 존재 자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곳은 이미 충만한 의미의 세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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