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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pr 14. 2019

봄, 4월, 마지막 꽃

 간밤에 문자가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늦잠을 자려 했으나 평소에 일어나던 시간에 눈을 뜬 나는 주말 아침부터 큰 손해를 입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심통이 난 채 집어 든 핸드폰 액정에는 다정한 말이 떠있었습니다. 



내일 비가 오면 꽃들이 다 질거래. 오늘이 꽃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야. 



 몸이 좋지 않아 나는 조금 더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다시 잠에 들지는 못하고 그간 듣지 못한 플레이리스트를 몰아 틀고 어젯밤 읽던 책을 다시 펼치기도 했습니다. 여유로운 시간동안 얼굴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습니다. 침대 머리맡의 창에는 하얀 커튼을 달아 놓았는데, 햇빛을 가리는 데는 영 쓸모가 없었죠. 사실 그런 이유로 선택했던 거예요. 햇빛이 몸 위로 쏟아져 부드럽고 따스하게 나를 깨우고 일으키는 아침을 좋아하니까요. 똑같은 햇빛이 꽃나무 위에도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일어나는 것을 더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껴 입은 뒤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과 내천은 지척입니다. 불광천까지는 오분도 걸리지 않고 홍제천과 합류하는 지점은 십분 남짓, 한강은 고작 십오분 거리에 있습니다. 불광천 양편에는 삼월말부터 개나리가 만개해 있었습니다. 출근길에 육교를 건너며 불광천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샛노란 빛과는 꽤 친숙해졌지요. 매일 아침, 노란 개나리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에너지를 꾸어다가 간신히 하루를 만들곤 했습니다. 불광천에서 홍제천으로 내려가면 벚꽃 나무들이 늘어납니다. 개나리가 생기를 주는 꽃이라면 연한 분홍의 벚꽃잎은 마음을 부드럽게 일렁이게 하는 꽃입니다. 이미 연둣빛 잎이 오돌토돌 돋아나 있었지만 여남은 벚꽃들이 봄빛 속에 흩날리고 있었고, 봄의 풍경을 출렁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봄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계절로 말해집니다. 그러나 나에게 봄은 가장 화려하게 슬픈 계절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처럼, 만개한 아름다움과 그것의 상실이 모두 이뤄지는 시간이니까요. 내 인생의 가장 시린 이별들은 거의 지난 봄에 놓여있습니다. 4월이 잔인한 달로 말해지는 것도 단순한 비유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4월은 비극들이 켜켜이 중첩되어 있는 달이니까요. 절정의 순간은 찰나에 그치고, 그것이 가리고 있던, 일상적인 슬픔과 고통이 드러납니다. 아름다움과 대비되어 이 잔인함의 농도는 더욱 짙어집니다. 봄은 그렇게 무서운 두 얼굴을 지닌 계절입니다. 봄꽃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나는 봄의 이중성의 애매한 경계, 그러므로 가장 정확하게 봄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염없이 걷다가 나는 한강을 꽤 멀리 거슬러 올라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강공원은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봄날을 속절없이 즐기는 이들로 활기가 넘쳤습니다. 삶의 건강함은 어쩌면 그런 순진무구함에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앞서 슬픔을 생각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져 나는 방향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위에서 그에게 늦은 답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봄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계절인 건 언젠간 아름답게 핀 꽃들이 질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이 예견되어 있더라도, 끝에 도달하기 전까지 그 아름다움을 품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는 거니까요. 화창한 날과 흩날리는 꽃들, 지금 이 곳의 들뜬 공기는 비극의 전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었어요. 



알려주어 고마워.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끝까지도 겸허히 준비하는 일일 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봄비에 모두 씻겨내려간 꽃잎들을 보더라도 그리 슬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이번 봄에 새롭게 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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