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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Dec 22. 2019

동지에는 팥죽을 챙겨먹습니다

나는 그걸 미신이 아니라 약속이라고 부릅니다


 한해의 시간을 감지할 때 제가 좋아하는 기준은 24절기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느슨하게 일년을 구분짓는다면, 절기는 훨씬 구체적인 계절의 감각을 주죠.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나 눈이 녹는 우수,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 등. 지구적인 기후문제로 슬프게도 우리나라의 뚜렷했던 사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절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농경사회의 전통 안에서 내려진 절기의 규정은 어쩌면 변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손쉽게 기온과 습도, 먼지 농도 같은 구체적이고 정확한 수치로 하루하루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지만, 자연이라는 더 큰 세계의 질서 안에서 오늘의 위치성을 가늠하는데 우리는 영 어리숙하니까요.

 한자어이긴 하지만 전 절기의 예쁜 이름들을 좋아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절기는 동지입니다. 24절기 중 22번째인 동지는 양력 12월 22~23일께 입니다. 일년 중 밤이 제일 긴 날이며, 그 이후부터는 낮이 서서히 길어져요. 태양의 힘이 다시 부활한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어 새해의 진정한 시작이라고도 말해지기도 하구요. 예로부터 설날 다음으로 신성하게 여겨진 절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동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이런 의미 때문은 아닙니다. 동지가 전통적으로 팥죽을 먹는 날로 전해내려오기 때문이에요. 네, 저 팥죽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저는 죽을 좋아해요. 소화기능이 약하기도 하고 원체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체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외에도 속이 편안하게 한끼를 해결하고 싶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이 죽이예요. 그중에서도 단팥죽과 호박죽은 저의 넘버원! 쌀이 적게 들어가고 재료의 풍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달달한 죽을 좋아한답니다. 그런데 굳이 팥죽을 먹을 수 있다고 동지를 좋아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첫번째 저의 대답은 ‘단팥죽과 동지팥죽은 다르니까요’가 될 수 있겠네요. 한국의 전통 팥죽은 우려낸 팥물로 죽을 쑤어 소금으로 간하는 담백한 버전이지만, 일본식민지와 근대화 과정에서 설탕이나 꿀을 넣어 달게 만드는 일본의 단팥죽 문화가 들어왔어요. 달달하고 되직한 단팥죽이 우리 입맛에 잘 맞아 훨씬 대중적인 음식이 되어 (요새 단팥죽 전문점 참 많죠. 단팥죽의 거점을 부산으로 보는게 학계의 정설!) 일반 팥죽을 파는 가게가 많이 없어요. 간편식으로 나오는 죽 종류를 봐도 그렇죠. 그러나 동지만큼은 그날에만 특별히 동지팥죽을 쑤어 파는 식당이 많답니다.

두번째 대답은 ‘악귀를 쫓아내주니까요’ 입니다. 제 대답에 황당한 표정을 짓거나 비웃으셔도 괜찮아요. 진정 제게는 이 이유가 더 크답니다. 몇년 전, 동짓날 만난 외국인 친구에게 팥죽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적이 있어요. 죽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았던 친구는 전복이나 닭이 들어간 것도 아닌 붉은 콩물로 만든 음식을 ‘오늘’ 먹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의아해했죠.

“한국 도깨비랑 귀신이 싫어하는 색깔이 빨간색이야. 밤이 긴 동지에는 대문 밖에 팥죽을 뿌리고 대문에 바르기도 했대. 악령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래서 동지팥죽은 액운을 막아주는 음식이야.”

친구는 저의 진지한 설명에 박장대소를 하더군요. “그건 완전 미신이잖아. 너처럼 합리적인 애가 미신을 믿다니 의외인걸.” 그때 그 친구에게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이건 미신보다 전통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설사 미신이면 어때. 내가 선택한 방식인데.”



4년째 동짓날 팥죽을 사러가는 망원동 시장의 전통죽집. 갈때마다 줄이 길게 서 있다. 평소에는 흰쌀죽, 호박죽, 단팥죽 등을 파는데, 절대적으로 담백하고 심심한 맛이 참 좋다.




믿음은 일종의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동지에 팥죽을 먹으면 새해에 액운을 막아준다’는 말을 믿는 것은 ‘동지에 팥죽을 챙겨먹어야지’하는 다짐이고, ‘다가오는 새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어’하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지에 굳이 팥죽을 챙겨먹는 수고는 연말에 제가 치르는 특별한 의식과 다름 없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을 넘기며, 특히 쫄깃한 새알을 제 나이만큼 씹으며, 설령 나쁜 것들이 나를 해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지를 다지게 되는 겁니다. 온 거리에 넘치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로맨틱한 분위기에 취해있다가 잠시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요.

누구나 사소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친구 한명은 신발을 왼발부터 신어야 나가서 밖에서 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믿고, 어떤 친구는 면접이나 시험 같은 중요한 날에 반드시 입어야 하는 와이셔츠가 있었습니다. 도서관에 늘상 앉는 자리가 아니면 공부가 안된다는 친구도, 잘 때 머리를 문쪽으로 향하면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도 있죠. 미신, 유언비어, 선입견, 망상 등의 이름으로 폄하될 때도 있지만, 그건 자신이 만든 소박한 약속이자 규칙입니다. 물론 그런 작은 규칙들에 얽매여 정작 중요한 것들을 망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저는 아무렇게나 살아버릴 수 있는 시간들에 신경쓰게 되는 약속 몇가지를 만드는 게 의미있다고 느껴집니다. 지키고 싶은 약속을 명심하면서 종종 습관처럼 무신경하게 지나치는 행동들을 의식 안으로 다시 들여올 수 있게 되니까요. 일상을 사는 나의 생각과 태도를 가끔 꽈악 조여주는 약속들. 그런 것들의 쓸모는 안일해지기 쉬운 삶에 분명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재래시장의 단골 죽집에서 팥죽을 사온 뒤 맛있게 먹었습니다. 냠냠. 다가오는 2020년을 멋지게 살아낼 것을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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