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May 10. 2020

오늘날 전쟁을 기억하려는 방식

메도루마 슌의 오키나와 문학 단편들

 <나비떼 나무>, <평화거리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으면서>, <물방울>, <바람소리>. 대학원 수업에서 오키나와 문제를 다루면서 작가 메도루마 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 출신의 작가는 어릴 적부터 오키나와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쟁체험담만으로 작가의식이 생겨난 건 아닌 듯 해요. 그의 에세이<<오키나와의 눈물>>를 보면 대학에 들어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문제를 실감하게 된 것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처럼 읽혀집니다. 즉, 1945년 세달 가까이 지속된 미군과의 치열한 전쟁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작가로써 전쟁에 대해 쓰게 만든 것이죠.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는 일본 안에서의 오키나와의 특수한 위치성과 오키나와 전쟁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는 차별과 희생의 역사가 잘 드러나있습니다. 


 <물방울>의 주인공 도쿠쇼는 별안간 오른 다리가 녹색깔로 부어오르고 엄지발가락 끝에서 물이 솟구치는 기괴한 병을 앓게 됩니다. 꼼짝없이 누워지내는 그에게 어느 밤부터 죽은 군인들의 망령이 찾아와 그 물을 받아먹죠. <바람소리>의 마을에는 전쟁때 만들어진 풍장터가 있는데, 그 입구에 놓인 두개골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구슬프게 우는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마을에 찾아온 본토 방송국의 후지이때문에, 아버지와 죽은 군인의 시신을 풍장터 옮겼던 세이키치는 다시 커다란 죄책감을 감당하게 됩니다. <나비떼 나무>에는 전쟁 당시 야마토(일본 본토)군대의 위안부이자 패전 이후에는 미군의 위안부로 일했던 고제이가 등장합니다. 늙어 치매에 걸린 그녀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요시아키를 자신의 지난 연인 쇼세이로 착각하면서 군대가 몰려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고 내몹니다. <평화거리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으면서>에서는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평화의 상징으로 뒤덮여지는 오키나와의 문제를 다룹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우타가 평화거리를 방문하는 황태자 부부의 경호 문제로 집 안에 감금되는데, 어린 손자인 가주가 이에 불만을 품고 복수를 결심하게 되죠. 우타는 퍼레이드에 난입해 황태자 부부가 탄 차에 오물을 묻혀 천황의 기만스런 행위를 욕보입니다. 


 반세기가 지난 전쟁에 대해 후세대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시간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너무 멀게 느껴져서, 역사서의 건조한 설명 몇 줄 정도로 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원체 복잡하고 미묘해서, 완전히 완결되고 끝이 나는 과거란 없습니다. 오늘의 시간 아래에는 과거의 지난한 축적이 놓여있듯이, 전쟁의 영향은 다른 형태로 지금-여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메도루마 슌의 소설쓰기는 정확히 그 지점을 문제시하는 노력이라 느껴집니다. 그는 오키나와 전장 현장의 참혹함을 소설적 공간으로 옮겨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체험한 1세대나 전쟁을 기억하려는 2세대의 인물들이 사는 오늘을 그려냅니다. 국가가 망각하고자 하는 전쟁을, 그 체험을 몸 깊숙이 각인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되살려냅니다. 또한 잊혀지는 것들에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급한가’를 고민하게 하죠. 그가 소설쓰기 외에도 오키나와의 미래를 위해 미군기지 반대 시위 등의 사회정치적 활동에 앞장서는 것도 그러한 문제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작품들을 ‘전쟁문학’이라는 용어 대신 ‘오키나와문학’이라고 칭하고 싶습니다.


 개인들의 체험을 통해 근현대사 문제에 접근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저에게 메도루마 슌의 작품들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국가는 줄곧 개인의 다양한 체험과 감정을 지워내면서 국가와 사회의 공식 역사를 써왔습니다. 그렇게 서술된 전쟁은 실제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고군분투했던 개개인의 체험과는 큰 간극이 있습니다. 가령 한국전쟁의 피난민들은 한국군과 인민군의 승패보다도 당장의 굶주림과 추위를 해결하는게 우선이었고 전쟁을 이념의 싸움이 아닌 생존의 극한으로 기억하고 있죠. 메도루마 슌의 작품에서처럼 우리 곁에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재현해내는 우타나 고제이가 있다면, 혹은 풍장터의 해골처럼 비명이나 울음으로 들리게 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더럽거나 공포스럽다는 이유로 외면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제대로 된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가늠하려 노력했을까요. 후세대인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비극은 언제고 오늘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불편한 이야기들을 들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 해요. 



*소개한 단편들은 짧고 읽기 어렵지 않으니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해요!

*<물방울>과 <바람소리>는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92번째 시리즈로 <<물방울>>(201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비떼 나무>는 글누림의 <<글누림비서구문학전집>> 8번째 시리즈로 <<오키나와 현대소설선:신의 섬>>(2016)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평화거리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걸으면서>는 문의 <<메도루마 슌 작품집>> 제1권인 <<어군기>>(2017)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태원의 과거를 기억하고 이태원의 오늘을 사는 여성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