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Jun 29. 2020

01-끝내 들을 수 없던 이야기

쫓겨난 대문 앞에서 하염없이 서있기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제 몸에 바다를 묻히고 왔다. 바람의 속살은 축축했고 비린 내음이 스며있었다. 그 바람을 맞고 내가 서 있다. 한참을 서있으니 오히려 가까운 건 바다이지 싶었다. 실제로 중산간 마을에 있었는데도. 내 앞에는 고작 가슴 높이까지 쌓인 돌담이 있었다. 은색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들어갈 수 없었다.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늘색 지붕 위로 먹구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늘에는 안과 밖의 경계가 없었다. 단층집은 마당의 우람한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일렁이는 초록의 잎 사이로 노란 귤들이 보였다. 커다라면서 단단한 빛깔. 하귤 나무였다. 하귤은 이름 그대로 여름에 나는 귤이다. 시큼하면서 쌉싸름한 맛. 양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재단의 직원은 매년 5월 할머니로부터 하귤을 선물 받았다고 했다. 할머니의 하귤은 평생 먹어본 하귤 중 가장 달다고 했다. 직원은 말을 하며 입 안에 침이 고이는지 몇 번 입맛을 다셨다. 곧 따시겠네, 5월을 넘기면 하귤은 영 못 먹게 되거든. 그러나 올해 5월 할머니의 하귤은 여전히 나무에 달려 있다. 여름을 지내본 적 없는 하귤은 난처해질 것이다. 스스로 거두어지는 법을 모르니까.


 도라지청을 든 오른팔이 뻐근해졌다. 양 할머니께 드리려고 가져온 선물이었다. 정확히는 할머니의 큰 따님인 강 할머니를 통해 전해드릴 선물이었다. 아침에 방문했을 때 강 할머니는 이층 옥상에서 빨래를 널고 계셨다. 대문을 들어서며 할머니 저 왔어요,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리쳤다. 집에 절대 들어가지 마요! 날카로운 경고에 나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얼어붙었다. 잠시 후 강 할머니는 빈 대야를 허리춤에 끼고 계단을 내려왔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쓱 올려다 보고 말하셨다.  


“그… 학생이 하도 부탁해서 오라고는 해신디 암만 생각해도 아닌 거 닮아게.”


 할머니가 마당 한 켠에 대야를 내려놓았다. 숙인 허리를 곧장 피지 않고 옆에 놓인 화초의 잎대를 만지작거렸다. 나의 시선을 외면하는 할머니의 모든 동작들이 내가 품은 희망을 천천히 무너트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난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어서. 그냥 가부러.”  


  끈질긴 노력 끝에 나는 강 할머니 자신에 대한 인터뷰를 허락 받았었다. 그 날은 약속했던 인터뷰 날이었다. 3개월 가까이 들인 노력이었고,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 시일은 촉박했다. 나는 절박한 마음이었다. 며칠 전 통화에서도 다정하진 않았지만 우호적이었던 할머니가 어떤 이유에서 돌연 마음이 변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연신 내 말을 자르며 완곡하게 거부하시던 할머니. 결국엔 버럭, 신경질을 내셨다.


“무사 영 귀찮게 햄서! 가부러 그냥! 할 말 어시난 가라고!”


 더이상 고집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저 가볼게요. 나는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인터뷰에는 실패했지만 챙겨온 선물은 드리고 싶었기에 나는 물러서며 강 할머니께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할머니는 한사코 거부하셨다. 내 팔을 밀치며 기어이 나를 대문 밖으로 몰아내셨다. 마침 남성 어르신 한 분이 마당으로 들어오셨고 할머니는 대문 근방에 멀찍이 서 있는 내게 들릴 수 밖에 없는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 인터뷰랜 허멍 왜 영 사람을 귀찮게 햄신지예. 잘도 정신 사나워.”


 안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사납게 닫혔다. 금속성의 소리가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었다. 


 그렇게 나는 대문 밖에서 한참을 서 있던 것이다. 당장의 갈 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할머니가 다시 맘이 바뀌거나 혹은 겸연쩍은 얼굴로 내다볼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뒤축에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어떻게서든 듣고 싶다는 미련이 붙어있었다. 한편 나의 욕심이 이 불행한 상황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몹시 괴로웠다. 한명은 고통의 기억을 말하길 거부하며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한명은 굳게 닫힌 문을 더 이상 두드릴 수 없다. 듣고 싶다는 욕심이 모두에게 옳을 순 없다. 나는 삶의 어떠한 굴곡들이 할머니가 과거의 회상조차 매몰차게 거부하게 만들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안타깝고 한없이 죄송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그래서 듣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강해지는 걸 내 안에서 가눌 수 없던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날 전쟁을 기억하려는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