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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04. 2020

3일: 중고서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산 이유

이전 주인의 흔적에 담겨있는 연약하고 조심스런 마음

 책을 좋아하고 다독하는 데에 비해 저는 책을 많이 사는 편은 아니에요. 책을 덜 사는 습관은 대학생 시절 돈을 아끼고 잦은 이사에 짐을 줄이려는 노력과 관련 깊지만. 여전히 도서관에서 대여해 읽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 도서관을 전전해봐도 찾을 수가 없거나 자꾸 또 읽고싶어지는 질 때. 저는 이 경우에만 책을 사요. 그런데 전혀 다른 이유로 책을 사는 경우도 있답니다. 종종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거든요. 절판된 책을 구하고 싶은 절박한 마음으로 뒤졌던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목적 없이 가서 우연한 발견을 기대합니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는 서점의 새 책에는 없는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저는 그런 흔적들을 우연히 발견하는게 좋아요. 맘에 든 페이지의 모퉁이를 접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에 연필로 희미하게 밑줄을 긋거나 식의 흔적들요. 가령 간지에 글을 써넣거나 메모지나 편지를 내지 사이에 끼워놓은 것도 발견하곤 하죠. 헌책방에서는 대부분 희귀해진 책이나 사랑스런 흔적이 남은 책들을 샀던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중고서점에서 산 책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었습니다. 이 책은 이미 여러 번 읽고 다른 글에서 인용도 한 적 있었어요. 표지부터 책 내지도 워낙 깨끗한 상태여서 꽤나 놀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 책을 사자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책을 잘 관리한 이전 주인이 남긴 단 하나의 흔적 때문이었어요. 책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보다가 발견했어요. 147쪽과 150쪽 위아래 모퉁이를 테이프로 봉해놓았더군요. 그러니까 148쪽과 149쪽을 보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셈이었죠. 왜 못보게 붙여놓았을까. 궁금증이 일어 페이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사이를 펼쳐보니 그 페이지엔 사진이 삽화처럼 들어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중국 죄수가 공개적으로 능지(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 형을 받는 사진이었어요. 살점과 신체부위가 찢겨져 심각하게 훼손된 그의 몸은 정말 보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저는 서둘러 그 페이지를 다시 닫아놓았습니다.


페이지 귀퉁이에 깔끔하게 붙여진 투명 테이프 보이시죠? 페이지 위아래에 저렇게 단단하게 봉해놓았더라구요.  




 <타인의 고통>은 베트남전과 이라크 전쟁과 관련되어 사진 이미지의 객관성과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현실을 투명하게 기록하는 사진도 사실은 촬영하는 작가의 시선이 개입되기 마련이며 때론 목적에 의해 조작되기도 한다는 점을 손택은 지적해요. 폭력과 비극의 이미지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이를 흥미거리로 소비하게 되면서 나와는 무관한 일로 인식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손택은 무책임한 연민이 아닌 고통과 두려움의 감정을 통해 그 비극에 어떤 식으로 연루되어 있는 우리를 반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책의 이전 주인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무감각한 이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는 잔혹한 이미지를 보는걸 괴로워했죠. 그리고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될 누군가도 비슷하게 괴로워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없이) 그 고통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그 끔찍한 사진의 페이지를 봉해놓은 거겠죠. 그의 연약하고 조심스런 마음이 남긴 흔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 책을 정말 사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을 것을–끔찍한 사진으로부터 잔혹함을 느끼는 것과 그 잔혹함이 누군가를 자신처럼 괴롭게할 거라는 마음씀- 계속해서 일깨우는 흔적이었으니까요.



 중고서점의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은 이제 제 서재에 놓여 있습니다. 이전 주인이 붙여놓은 테이프는 억지로 떼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고통을 말해야 할 때. 저는 항상 붙여진 147쪽과 150쪽을 떠올립니다. 내가 너무 섣불리 타인을 대상화하지 않는지, 대상화된 고통이 제삼자에게 또다른 고통으로 작용하진 않을지. 한번 더 생각해보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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