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내가 다시 돌아올 나를 위해 하는 배려
오늘은 오후 비행기를 타고 제주 본가에 내려왔습니다. 50분 비행을 했을 뿐인데 서울과 제주의 하늘은 확연히 달랐어요. 서울의 오랜 장마 동안 폭우 아니면 흐린 하늘만 봐왔기에 먹구름 하나 없이 청명한 제주의 하늘이 여간 감동스러워보일 수 없더라고요. 보통 제주는 바다로부터 형성된 습기로 여름이 더 덥고 불쾌하다고 여겨지는데, 이번 제주는 달랐습니다. 서울이 워낙 높은 습도가 지속되며 힘들었기 때문에 제주가 오히려 덜 덥고 산뜻하게 느껴졌어요. 역시 절대적인 진리 같은 건 없고, 모두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걸 느낍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이 아름다운 섬을 고향으로 둘 수 있음은 큰 축복입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살지만 언제든지 훌쩍! 찾아갈 가족이 제주에 있다는 사실도 행운이구요. 여행을 참 좋아하는 저에게 이 멀지 않은 고향이 없었다면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힌 올해는 버티기 어려웠을 거예요. 저는 매년 못해도 1번 정도는 해외로 여행을 떠나왔습니다. 신년 계획을 세울 때 수많은 여행지 중 어디를 택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였죠. 다년간 쌓은 여행 경력 덕분에 저는 저 스스로를 꽤 괜찮은 ‘여행가’라고 자부합니다.
노련하고 개방적인 여행가지만, 저에게도 여행에 관한 한 한가지 강박증이 있습니다. 바로 여행으로 오래 집을 비우기 전에 집을 청소하는 습관이예요. 보통 짐은 미리 싸놓거나(장기 여행일 경우) 몇시간 전 대충 챙겨서 떠나는데(단기일 경우)요. 떠나는 당일은 하루종일 청소를 하는데 다 써버립니다. 바닥을 쓸고 닦는 것부터 시작해서, 분리수거와 쓰레기를 버리고(심지어 종량제 봉투를 다 채우지 못했더라도 꼭 내다버려요) 마지막까지 사용한 물컵까지 설거지를 해야만 합니다. 살림살이는 제자리에 정돈해놓고 모든 플러그는 빼놓죠. 그래서 여행의 짐을 깜빡하고 챙기지 못한 경우는 종종 생기는 반면, 집에 돌아와 ‘내가 왜 이렇게 하고 갔지?’하며 황당해하거나 괴로워한 적은 거의 없어요. 가장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로 집을 나서는 것, 그것이 여행을 떠나는 저의 강박관념이니까요.
오늘 이 습관이 생기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어요. 아마도 여행에 대한 태도보다는 집의 의미와 관계된 것 같습니다. 저는 독립해서 혼자 산지 10년이 넘었어요. 혼자 사는 집은 제게 가족이 함께하는 또다른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떨어져 혼자일 수 있는 은신처의 기능이 큽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집은 누군가가 나를 반겨주는 곳이 아니예요. 오로지 제가 남긴 흔적이 저를 기다리는 곳이죠. 청소는 여행이 끝나고 다시 돌아올 저에게 행복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들이는 노력인 셈입니다. ‘여행도 좋았지만 역시 내 집이 최고야!’라고 외칠 수 있도록 미래의 저를 배려하는 거죠. 떠나는 제가 아니면 돌아올 저를 아무도 그 환대를 해주지 않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아무 노력없이 얻어지는 ‘집’ – Home-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내는 공간이 엄연한 나의 ‘집’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하는 존재일 거예요. 그건 비단 집이란 공간에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죠. 사람도, 관계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특히 자연적으로 맺어진 관계들-가족과 친지부터- 사회적으로 형성된 그룹과 소속까지, 나의 의지로 성취한 관계가 아닐 지라도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선 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당연하게 누릴 수 있다고 여겨질 만큼 하찮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정말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