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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31. 2017

3월-고향집(2)

고향 동네

나에게 고향의 동네는 아담한 곳으로 기억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는 아주 어렸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곳이라곤 내가 걸어다닐 수 있던 가까운 곳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서귀포 바다를 향해 너그럽게 몸을 기울인 언덕의 능선 아래에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바다를 사랑했기 때문인지, 동네에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은 없었습니다. 건물이란 단어가 어색할 만큼, 나의 동네는 누군가의 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습니다. 조곤조곤한 삶들만 모아놓은 터전이었지요. 


동네 정중앙에는 내리막 도로가 바다로 뻗어있었습니다. 1차선의, 크지 않은 도로 양쪽으로 집들이 잔가지를 친듯한 모양이었습니다. 나의 고향집은 언덕 경사가 시작되는 도로 입구에서 세번째 집이었습니다. 도로 건너편의 이층집에는 큰외할아버지의 대가족이 살았습니다. 그 맞은편에는 멋드러진 벽돌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셋아버지의 집이었습니다. 셋아버지댁 뒤에 파란색 지붕의 집은 진우 오빠네 집이었습니다. 친척은 아니었지만 나와 동생을 친딸처럼 길러주신 가족이지요.


오르막 도로를 더 올라가면 작은 골목가게와 비디오가게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방앗간이 있었습니다. 떡을 빻고 참기름까지 직접 짜는 곳이었는데, 가게의 이름도 외관도 기억나진 않지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풍기던 고소한 참깨냄새는 선명합니다. 옹기종기 모인 작은 구멍가게 촌들을 너머 올라간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너무 가파르고 멀다고 느꼈던 거겠지요. 내리막 도로가 끝나는 지점은 칠십리 바다로 내려가는 길과 정방폭포와 서귀포항 방향으로 나뉘는 교차로가 있었습니다. 그 교차로에 접한 골목가게까지가 혼자 갔던 곳, 그러니까 내 유년 시절의 전 세계였습니다. 


작은 동네였기 때문에 모두가 서로를 알 수 밖에 없었고, 단순히 가까이 사는 이웃 관계를 너머 서로의 속사정까지 나누는 사이였다고 기억합니다. 어떤 집의 잔치가 열리거나 상이 있을 때 모두가 두 손을 걷어부쳐 도왔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는 길에서 나누는 인사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분명 그 동네 전체에 감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뒷집 아주머니는 돌담에서 미끄러지는 나를 맨발로 뛰어나와 받아주신 적이 있습니다. 골목가게의 주인 아저씨, 아줌마들은 늘 외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으며, 소주 한 병 어치의 돈을 내도 군것질거리를 봉지에 같이 넣어주시곤 했지요. 가슴 높이를 넘지 않았던 담 너머로 우리는 서스럼없이 서로의 삶을 공유했습니다. 모든 집의 마당이 어린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어른들은 안방에서도 우리를 반겨 안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의 자식이었고, 모두가 우리의 부모였습니다.   


세월이 훌쩍 지나서도 떠올리며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유년세계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이시영 시인은 유년의 풍경이 사람을 형성한다고 말했습니다. 나 또한 그를 믿고 있습니다. 낮고 소박한 집들과 가족과 타인이 구분되지 않는 선한 이웃들. 우리 동네를 감싼 포근한 마음의 온도. 저 멀리 내다보이는 파란 바다와 섬들. 나는 그런 정겹고 소박한 풍경을 닮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글을 쓴다면, 그 풍경에서 멀어지지 않은 무엇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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