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없어 몸으로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들에 대한 생각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볼까요? 지난 <제7의 인간> 안무극 후기를 읽고 어떤 분이 ‘왜 몸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중요한가요?’ 라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에 답하는 후속글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가 쓴 <몸의 증언>이란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이죠. 부제가 의미하듯 이 책은 특정한 고통은 몸을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저자는 암과 심장병 투병에 대한 회고록 <아픈 몸을 살다>를 쓰기도 했는데요,* 두 책 모두 아파하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자기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통증에 대한 말은 종종 사적인 푸념으로 취급되지만, 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료제도의 한계, 의료서비스의 접근성, 의학에 내재된 차별성 등-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몸이 앓는 병과 이로써 경험하게 되는 삶의 곤경들, 신념과 가치관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인 힘을 지닐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회적으로 억압되어온 특정 질병과 고통은 쉽게 말해지지 못해왔습니다. 에이즈 환자가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낙인이 찍히는 경우를 떠올려보세요. 부인과질환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의심과 분리되지 않았고, 여성의 두통이나 월경전증후군은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 탓으로 돌려지기 일쑤죠. 질병에 대한 이미지는 순수한 의학만이 아닌 그 사회의 특수한 윤리적, 문화적 평가가 덧씌워져 구성됩니다. 그리고 어떤 증상은 공식적인 ‘질환’으로 승인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특정 시술과 관리는 공식적인 의학의 분야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불법’으로 규정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죠. 사회문화적 통념과 의학이 연합한 차별적인 구조 속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되어온 어떤 아픔은 그래서 언어가 되지 못했습니다.
소설 <빈 옷장>은 주인공인 화자가 임신중절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불법이었던 시술을 받기 위해 그녀는 몰래 산파를 찾죠.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말이예요. 배 안쪽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끔찍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참고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합니다. 그녀가 신봉했던 책, 학문, 위대한 사상조차 ‘낙태’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던 겁니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묘사하거나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게끔 도와주는 대목은 한 구절도 없다. 탄생, 결혼, 임종, 모든 상황마다 그에 따른 기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모든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낙태 전문 산파의 집에 갔다가 나온 스무 살의 여자아이를 위한, 그 여자아이가 걸으면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면서 생각하는 것에 관해 쓴 구절. 그렇다면 나는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책은 그런 일에 대해 침묵한다. 낙태 기구에 대한 훌륭한 묘사, 낙태 기구의 변모……”
-아니 에르노, 신유진 역, <빈 옷장>, 1984Books, 2020, pp. 8-9
프랑스의 여류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빈 옷장>이 쓰인 해는 1974년입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임신중절이 ‘불법’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중절을 감행해야 하는 여성들은 목숨을 걸며 음지에서 이 시술을 받아왔죠. 1971년 프랑스 여성 지식인들이 낙태죄 폐지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잇달아 밝히는 ‘343 선언’이 시작됐고 이는 75년 결실을 맺게 됩니다. 아니 에르노의 고백 또한 이러한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요. 한편 한국은 어떨까요. 뿌리깊은 유교사상과 가부장제 전통이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2000년대까지도 임신중절은 감히 꺼낼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70년대 이전의 프랑스처럼 당사자들이 참조하거나 힘을 더해줄 언어도 없었죠. 그 속에서 언어 대신 몸으로 그 고통과 불합리함을 폭로했던 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도를 올해 3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불의 회고전 <이불 시작>에서 보았습니다. 이불은 인간의 신체, 특히 억압당하는 여성의 몸의 문제에 천착한 작가입니다. 이 회고전은 작가의 초기작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데, 이 중 ‘낙태’라는 제목의 퍼포먼스 영상이 포함되어 있었죠. 1989년에 행한 퍼포먼스에서 작가는 알몸으로 관객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등산용 밧줄에 몸을 묶어 공연장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요. 자신이 경험했던 임신중절의 고통을 다른 형태의 ‘학대’로 전치 시키는 시도였지요. 괴로움에 울부짖는 작가의 비명에 관객들은 얼마 견디지 못하고 퍼포먼스를 중단시킵니다. 여기에는 임신중절의 이유를 설득하거나 그 과정을 서술하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그 고통을 떳떳하게 표명하지 못하는 부당한 억압의 문제는 벌거벗은 몸과 비명과 뒤틀림으로 전달되죠. 작가의 몸에 가해지는 통증은 관객들을 제3의 ‘관람자’가 아니라 ‘목격자’이자 ‘공유자’로 연루 시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없던 것’이고 ‘멈추게 할 수 밖에’ 없던 거죠. 여기서 개념적인 이해 대신 신체적인 감각으로, 간극을 둔 감상이 아닌 적극적인 참가(중지)로 관람을 변화시킬 수 있던 것은 몸을 ‘통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야기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수많은 한계 속에서 말하기를 시도하는 몸은 그 언어들을 초과한 형태로 증언합니다. 몸으로 말하는 방식, 몸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몸을 증언하는 장으로 바라보는 것은 언어의 한계 뿐만 아니라 언어를 중심으로 사유하고 소통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지능력의 한계 또한 타파하는 시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자아내는 감각, 느낌들은 대부분 명확히 이해하기 힘들고 서술불가능한 지점에 놓여있는 듯 하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파악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가 열어주는 새로운 인식의 터를 닦을 것이라 믿어요.
*한국에는 <몸의 증언: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이 먼저 번역되어 2013년 출간되었고, 이후 <아픈 몸을 살다>가 2017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사회는 오랜 투쟁 끝에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냈고, 2021년 1월 1일 낙태죄 처벌조항이 폐지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입법공백을 어떻게 매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중요해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