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두 안무극 <제 7의 인간>을 보고
조명이 들어온 무대. 무용수들 앞에는 곱게 개어진 옷들이 놓여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침착하고 신중한 동작은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익숙해져 편안한 옷을 벗어 낯선 옷을 걸치며 그들은 이전과 다른 정체성을 덧입습니다. 낯선 땅에서 맞닥들이게 될 고된 노동과 수난, 차별과 외로움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허나 벗은 옷을 정갈히 개키는 모습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어떻게든 나아갈 거라는 단호한 의지입니다. 그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습니다. 입에서부터 목을 지나 폐 깊은 곳까지 호흡을 따라 너울거리는 손가락 끝은 공기 같기도, 영혼 같기도 합니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 반복 속에 어느 순간 여정은 시작됩니다. 이제 이들은 이주 노동자입니다.
안무극 <제 7의 인간>은 존 버거가 글을 쓰고 장 모르의 사진이 담긴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미술평론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는 이 책에서 서유럽으로 몰려든 이주 노동자의 삶을 통해 1970년대 산업자본주의의 참상을 파헤칩니다. 산업화로 세계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선진국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개발도상국으로 분화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선진국의 공장으로, 탄광으로, 공사장으로 간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과 비인간적 대우를 감내하면서 일해야 했죠. 책 <제 7의 인간>이 이주 노동자 개개인의 경험을 거시 구조와 연결시켜 독자에게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는 사회학적 책이라면, 정영두 안무가는 이들의 체험을 몸을 매개로 관객과 이어줍니다.
<제 7의 인간>을 읽은 저에게 이 80분의 안무가 책의 내용을 얼마나 잘 형상화했는지를 물어본다면 당황하고 말 거예요. 책과 안무는 다른 언어와 전략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무용에 문외한인 저는 동작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안무극에서 몸과 그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은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 너머에 있습니다. 그곳에 있기에 예술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되려 이렇게 바꿔야만 좋은 질문이 되겠지요. 이 안무가 어떻게 책의 비판적 분석과 훌륭한 문장을 무대 위로 가져오는데 실패하는지, 그 실패의 지점에서 무용수의 몸과 동작이 다르게 말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극 전반에서 반복되는 주요 안무들이 몇 있지만, 제게 가장 강렬한 충격을 준 것은 ‘분절’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두 팔과 두 다리로 바닥을 짚은 상태로 무용수들은 음악의 빠른 템포에 온몸의 관절을 튕겨냅니다. 그 격렬한 동작은 마치 몸이 여러 개의 부품들로 이루어진 분절된 기계로 느껴지게 합니다. 컨베이너 벨트 앞에서 반복노동을 하거나 열악한 현장에서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이주 노동자의 몸이 겹쳐 보였습니다. 노동하는 자신의 몸에 대한 스스로의 감각 또한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값싸고 열등한 ‘노동력’으로 취급되면서 타국에서 비인간으로 존재하는 자신에 대해 느꼈을 참담함이 제 안에서도 끓어올랐어요.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차별 받으면서 외롭게 버텼겠지요. 사랑하는 가족, 집, 일상으로 돌아갈, 기약 없는 귀향을 꿈꾸며 떠도는 삶. 상상할 수 없는 경험과 감정들은 몸과 안무를 통해 구체적인 언어를 거치지 않고 저에게 곧장 도착했습니다.
정영두 안무가는 구체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하지만 추상적인 움직임으로 몇 겹의 전이 단계를 거치는 무용의 특성을 지적합니다. 동시에 사실과 관객 사이에 놓인 먼 간극을 좁힐 수 있는 힘 또한 무용이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죠. 그렇기 때문에 <제7의 인간>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차라리 책을 덮고 안무를 안무 자체로 보아달라고 말합니다.* 몸의 언어는 멈추게 되는 호흡으로, 살결의 소름으로 읽힙니다. 온몸에 잔뜩 긴장을 하게 되거나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서 땀이 고이기도 합니다. 느낌과 감각으로 전해지는 무용의 서사.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함축한 것인지, 그 느낌들은 왜 일어나는 것인지 묻는 것은 부차적이고,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용수의 격렬하고 섬세한 동작들, 뛰어오르는 땀방울들, 거친 호흡과 곤두선 근육의 핏줄들. 이 몸들을 향해 나의 감각을 활짝 열어젖힐 때, 나의 몸 일부가 이주 노동자의 존재와 삶을 가까스로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걸 거예요.
*정영두 안무가의 인터뷰 영상 참고!
이 글은 2021년 6월 4-5일, 양일간 LG아트센터에서 진행된 공연을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공연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