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동거생명, 몬스테라
생활치료센터에서 퇴소를 하고 돌아왔을 때 집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부재한 15일분의 한기와 고요. 짐을 풀기 전에 집 안의 모든 문과 창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바람이 깊은 골짜기 안에서 휘몰아치듯 집 안을 휘저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바닥을 닦았다. 제일 큰 쓰레기 종량제봉투를 꺼내 평소라면 망설였을 것들을 미련없이 담아 버리기도 했다. 모두 내가 악몽을 꾼 다음날 하는 의식들이었다. 반신욕까지 마치고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니 지난 날들이 길고 지루한 꿈 같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컴컴한 집 안에서 사물의 그림자들이 연하게 피어올랐다. 빛과 음영의 어렴풋한 경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들은 슬그머니 움직이곤 했다. 현실과 꿈이 겹쳐진 몽롱함 속에서 나는 그날 참 깊게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오래.
그러곤 다시 일상이었다. 바싹 말라있던 몬스테라는 며칠 물을 주자 서서히 기운을 냈다. 늘어져있던 줄기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도 그의 곁에서 구부러져 있던 등을 펴려 노력했다. 한동안 앓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마르고 시들해진 몬스테라와 운명의 공동체처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짐을 옮기다 그만 화분을 치고 말았다. 몬스테라는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몇 개의 줄기가 꺾여버렸다. 쏟아진 흙을 쓸어담으며 눈물이 났다. 회생이 어려워보이는 큰 잎은 얼른 잘라내 물을 담은 컵에 옮겨 담았다. 잎도 작고 연해보이는 줄기는, 어쩌면 회복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급한대로 단단한 종이들을 겹쳐 지지대를 만들어주었다. 같이 힘을 내보자. 몬스테라는 대답 없이 묵묵히 푸르기만 했다.
며칠 뒤 나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분갈이를 했다. 동네 화원에서 몬스테라를 데려온 지 거의 6개월 만에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 놓고 키우면 발육이 빠르지 않을 거라고 날 안심시켰지만, 속화분을 들어내보니 물구멍으로 뿌리들이 뻗어나와 있었다. 다부진 뿌리들이 살아보겠다고 비좁은 화분 밖으로, 흙도 물도 없는 바깥 세계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뿌리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화분을 깨어내고 더 큰 화분으로 옮겼다. 겉도는 주변을 배양토로 채웠다. 영양제도 뿌리 가까이 대어주었다. 겉흙을 토닥이며 이제는 맘놓고 커도 된다고 말을 걸었다. 아니, 꼭 잘 자라달라, 부탁했다. 나랑 오래오래 건강하자고. 이번에도 몬스테라는 말없이 영양제만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식물은 분갈이를 할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터전을 옮길 때 우리가 겪는 상실감과 불안, 적응의 어려움을 식물이라는 생명도 감당한다. 다만 표현하지 못할 뿐. 그러나 꺾인 줄기를 자주 들여다보면서 달리 생각하게 됐다. 사실 식물도 식물 나름으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다만 내가 알지 못하는 거라고 말이다. 인간은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언어의 자명함을 믿고 있고, 그 낙관적 믿음이 대화와 대화아닌 것을 구분해버린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서도 이루어지는 무수한 대화들이 있다. 눈빛, 손짓, 기우는 몸, 가벼운 발걸음이나 비명 또는 침묵 같은 것들. 말해지지 않는 것의 의미에 대해 예민하게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만 가능한 대화. 반려동물의 낑낑거림이나 몸짓으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가족들처럼, 어쩌면 식물도 오래 바라보고 깊은 애정을 쏟다보면 마침내 그들의 표현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오래 바라보면 움찔거리는 그림자의 경계처럼.
새로운 대화가 시작될 때 닫혀있던 세계의 일부가 열린다. 새로이 대화의 장에 들어설 수 있는건 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일 테다. 동시에 시작되는 대화로부터 또다시 변하게 될 것임을 예감하는 일이기도 하고. 소중한 동거생명, 몬스테라와 나는 이제 그래볼 참이다. 사놓은지 꽤 된 책 <식물의 사유>를 오늘 펼쳐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