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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n 10. 2017

함께 살아가기 위한 용기

영화 <꿈의 제인>



 두부처럼 물컹하고 밍밍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여자아이는 어디에도,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모텔에서 함께 동거하던 유일한 의지처 오빠 ‘정호’가 도망가버리고, 아이는 그 방 욕실에서 손목을 긋습니다. 피가 욕조물에 퍼져나가는 순간, 누군가 모텔방 문을 두드립니다. 아이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문을 엽니다. 그러나 문 앞에는 기다리던 오빠 ‘정호’가 없습니다. 거기엔 그녀처럼 오빠를 찾는 제인이 있었습니다. 제인은 아이의 팔에서 떨어지는 피를 봅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제인은 아이의 엄마가 됩니다. 



 제인에게는 이미 두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낳고 기른 친자식은 아닙니다. 오갈데 없는 아이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이지요. 제인은 인생이 원래 불행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이 예정된 삶 속에 아주 낮은 확률로 행복이 드문드문, 한 소꿉씩 뿌려지는 것뿐이라고요. 그녀는 불행한 이들이 함께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자신이 야속한 운명에 소심하게 반격하는 일이라고 믿는듯 합니다. 아이는 제인 곁에 있게 되지만 그녀를 이해하진 못합니다. 제인의 말들에 소심하게 ‘알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아이는 제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이후 들어간 팸(family의 준말)에서도 아이는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일고여덟 되는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불 한 채를 차지하긴 하지만 그 이상의 존재감이 없지요. 자신을 각별히 챙겨주는 언니가 생겨도 아이는 함께 어울리는 삶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뒤늦게, 죽은 언니를 바라보게 되지요.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무능한 아빠의 손을 물때도, 팸에서 오만원을 받고 버려질 때도, 제인이 일했던 뉴월드를 찾아가 낯익은 직원들에게 인사할 때도, 언니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아 그녀인 척 약속장소로 나갈 때에도, 그녀는 모릅니다. 자신의 거짓말과 연기가 탄로 났을 때 아이는 결국 울어버립니다.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지.” 


그건 변명이 아니라 고백이었습니다. 



제인이 삶의 불행과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렸던 바다




 아이는 혼자 초코렛을 먹다가 제인에게 들킨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집 밖으로 나와 초콜렛 두알을 한꺼번에 입 안에 넣고 먹고 있었으니까요. 제인이 못된 애라고 혼을 내자, 아이는 남은 초코렛 한 알을 제인에게 건넸었습니다. 그 후 언젠가 제인이 딸기생크림 케이크를 사서 두 아들과 두 딸과 나누어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앞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하나씩 덜고 남은 세 조각을 바라보며 제인은 말합니다. 부족하게 남았을 때에는 먹지 못하는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차라리 모두 먹지 않는 게 낫다고 말이지요. 그건 제인이 생각하는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었을 것입니다. 



 제인은 넉넉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손님 없는 트렌스바에서 노래를 불러 얻는 수입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에겐 남들이 믿어주지 않는 사실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랑했던 ‘정호’를 잃고 꿈에서나마 그의 연인이 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말했지만, 더는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죽음에 몸을 던지기 전까지 자식들을 위해 김밥을 말 정도로 함께 있는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은 후에서야 아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알려주고 했던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영화 속 이들의 불행은 시리지만 영화는 아름답습니다.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에서 벗어나 뒤죽박죽 말해집니다.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마치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처럼 방향을 잃은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아이의 독백은 일정 부분 제인의 말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지지요. 제인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모든 게 아이의 비밀스런 꿈의 일부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이에게는 분명 그럴 것입니다. 제인은 꿈처럼 신비하고 환상에 가까운 존재였겠지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그런 제인마저도 견딜 수 없게 척박했으니까요.



 아이는 뛰기 시작합니다. 이를 악물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기도 하고 하얀 볼에 미소가 번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신의 안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는 아이가 왜 가출을 했고 어쩌다 발가락 하나가 잘려나갔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떤 이유로 자기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는 지금 여기, 끔찍한 불행에서 한 줌의 행복을 건져내기 위한 용기가 필요할 뿐 입니다. 그건 타인으로부터, 운명으로부터 더는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용기. 불행한 얼굴로 또 다른 불행한 누군가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혼자 남게 될 내일을 두려워하기보다 함께 있는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는 용기. 모두 언젠가 꿈의 제인이 가르쳐준 것들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소현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이름으로 불려져도 좋을 아이입니다. 이기적이거나 소심하거나 노련하지 못한 우리의 얼굴을 조금씩 나눠가진 소현을, 많은 사람이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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