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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Oct 19. 2017

17. 진실의 부정을 용서해선 안된다

홀로코스트, 영화 <나는 부정한다> 그리고 진실에 대하여

 1996년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은 미국 에모리 대학의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홀로코스트 연구 전문가인 그녀가 쓴 저서 <Denying the Holocaust>에서 자신을 모욕적으로 언급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어빙은 그녀가 자신에게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라는 거짓 누명을 씌웠고 역사학자로서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주장했다. 데보라는 사람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싸우기로 결심한다. 세상에는 무시할 수 있는 논쟁이 있고, 적당히 합의할 수 있는 갈등도 있지만 데보라는 어빙과의 싸움은 피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어빙이 부정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정한다>는 실제 벌어졌던 어빙과 데보라의 법정싸움을 영화화한 2016년도 작품이다. 영어 원제는 DENIEL. ‘거짓이 승리하는 것을, 진실이 침묵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라는 부제가 내용을 구체적으로 암시해준다. 폴란드와 독일 여행을 다녀왔을때, 이 영화는 막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더군다나 상영관이 몇 곳 되지 않아 결국 보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찾아서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여행에 돌아와서도 아우슈비츠와 비르켄나우 수용소가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고 마음으로도 외면할 수 없는 현장의 진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공식 포스터






 나치 군은 유태인 살상 계획을 교묘하게 은폐해왔다. 공식적인 대외문서 또는 내부 문서에서도 살해, 학살, 처형 등의 단어를 쓰지 않았다. 인종청소라고 불리기도 했던 유태인 살상 계획은  ‘Final Solution’, 마지막 해결책이란 명칭으로 통용했다. 명칭의 애매모호함에 뒤어 숨어서, 그들은 600여만명의 유태인, 당시 유럽에서 살던 유태인의 2/3에 해당하는 이들을 죽였다. 그들은 전쟁에 패해 퇴각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수용소와 유태인 무덤 등을 모두 태워 증거를 인멸하고자 했다. 


 종전 후 전세계적으로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알려졌음에도 이를 부정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어 왔다. 그들의 논거는 다양하다. 히틀러가 직접적으로 홀로코스터에 대한 명령을 내린 적은 없다고 주장하거나, 처형이 아닌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집단 죽음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치가 만든 각종 수용소와 처형시설이 홀로코스터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학살이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한다.알려진 유태인 희생자의 수가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하는 소극적인 부정도 있다. 


 데이비드 어빙은 급진적인 부정론자 중 하나였다. 그는 히틀러를 이성적이고 똑똑한 독일의 영웅이라고 칭송했으며, 그가 홀로코스트를 명령하지 않았고 그 계획 자체도 몰랐다고 주장해왔다. 수용소의 유태인 생존자들에 대해서는 팔뚝에 새겨진 타투(그는 수감번호를 이렇게 표현했다)로 돈을 뜯어내려는 이들이라는 등의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어느 문헌, 어느 현장도 나치가 계획 하에 홀로코스터를 자행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지 않는다며, 대중이 통념의 허점에 빠져있다고 선동했다.



실제 다이비드 어빙(David Irving). 히틀러에 대한 미화로 논란이 됐던 그의 저서 <Hitler's War>도 보인다. (출처:위키피디아) 
영화에서는 티모시 스폴 배우가 어빙 역을 맡아 열연.  





 데보라는 홀로코스트의 방식이나 책임에 대해서 논쟁할 수는 있으나 홀로코스트의 존재 여부 자체를 논쟁할 순 없다고 말한다.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학살에서 살아남고 진실을 증언해줄 생존자들이 남아있었다. 완전히 소각되지 못한 살상의 터도 보존되어 있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터를 부인하는 것은 수백만명의 희생자를 모독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역사학자라는 공인이 개인의 선호와 편향된 믿음에 따라 편향적인 주장을 하는 것을 그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데보라는 재판을 통해 어빙이 홀로코스터를 부인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고의적인 잘못임을 확실하게 밝히려고 한다. 하지만 싸움은 쉽지 않았다. 어빙이 데보라를 고소한 영국 법정은 피고 측의 법률적 책임이 더 무겁다. 영국에는 미국과 달리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원고가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데보라는 영국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로펌과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긴 재판을 준비한다.

 

 그녀의 로펌은 냉철하고 침착했다. 감정적인 성향이 강한 데보라에게 그들은 사무적으로 비춰져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데보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함께 둘러본 법정 변호사가 증거를 찾는 데만 몰두하고 애도를 표하지 않아 언짢아한다. 또한 그녀는 변호사에 의해 법정에서 직접 진술을 할 수 없게 되고, 그녀가 제안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도 거부당한다. 데보라는 항변한다. 자신의 재판인데 왜 자신이 원하는 데로 싸울수 없느냐고. 그녀는 그들이 자기 자신만큼 진심으로 이 재판에 임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호사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전장인 법정에 가장 알맞은 재료와 자세로 치열하게 임했다. 법정은 감정의 논리가 아닌 이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들은 궤변론자에다 지능적인 어빙에게 약점을 잡힐 모든 위험을 경계했다. 설사 생존자의 증언이 그들의 승리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홀로코스터 생존자가 법정에서 어빙에게 모욕을 당하게 할 순 없다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생존자 기억의 모호함이나 왜곡이 어빙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위험도 있었다. 대신 그들은 역사학자와 지식인들을 증인으로 참석하게 하여 어빙이 저서에서 저지른 역사적 왜곡을 조목조목 밝혀내고, 수용소가 집단 살상을 위해 건축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길게 이어지는 공판 중에 데보라가 묻는다. 우리의 전략은 무엇이냐고. 변호사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전략은 없어요. 사실들로 질식하게 만들 겁니다.




 4년간의 소송, 32번의 공판. 이 역사적인 공판에서 데보라는 결국 승리했다. 판결문은 무려 334페이지에 달했다. 판사는 어빙이 고의적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은폐, 왜곡해 홀로코스터를 부정해왔다고 판결했다. 그는 법정에서 반유대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선고되었다. 데보라의 변호팀은 재판이 끝나고 어빙이 청한 악수를 무시하고 뒤를 돈다. 감정이 배제된 채 진행되어온 공판-장르적으로는 자칫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시간-의 마침표는 감격스럽다. 진실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과 집념이 결국 승리를 이루어냈으므로. 그들이 이긴 것은 단순히 어빙만이 아니다. 불순한 의도로 진실을 가리고 거짓을 만들어내는 부정론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한 평론가는 <나는 부정한다>를 가벼운 잽은 없지만 묵직한 한방이 있는 영화라고 평했다. 그건 실제 재판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역사적인 비극과 부정에의 항거를 경건하게 다루는 태도가 담긴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진실'이라는 것 앞에서 느끼는 어떤 숭고함도 한 몫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4년간 이어진 그들의 재판처럼 침착하고 집요하다. 드라마틱한 전개도 감정이입의 강요도 없다. 그만큼 시사하는 점이 많다. 명예훼손이란 명목이긴 하지만 역사의 진실이 법정에서 판가름되는 흥미로운 재판을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달리 이성의 논리를 통해 그들의 훼손되고 폄하된 희생을 위로한다. 역사학자는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의 비호 아래 개인의 사상과 신념을 역사의 해석에 얼마나 이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편향된 시각에 매몰되기 쉽다는 점은 언제고 상기해봐도 무섭다. 역사학자 어빙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조한 대중을 보더라도 그렇다. 일단 하나의 믿음을 갖게 되면 편중된 정보만을 얻으며 믿음을 강화해나간다. 헤어나오기 힘든 편향의 늪에 빠지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진실을 구하는데 게으른가. 당혹스럽거나 불편해지는 앎을 외면하는데 더 능숙하다. 그렇게 묻힌 진실과 감은 눈,귀 기울여지지 않는 목소리가 쌓여간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진실이 왜곡되는 방식도 다양해졌다.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지구 반대편의 일도 시시각각 전해지는 시대다. 그래서 어떤 사건의 발발을 부정하긴 힘들어졌다. 그러나 사건의 깊은 층위를 해석하는 일은 더 연약해졌는지 모른다. 이제 뉴스 토픽도 시장의 상품처럼 소비되는 건 아닐까. 자극적인 사건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고 불처럼 여론이 들끓다가도 곧 잊혀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빨리 다른 이슈로 갈아타는 것이다.

 

 속도가 최고로 각광받는 시대가 되면서 끈기나 인내 같은 덕목이 경시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앎의 소유보다 정보의 소비가 지배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식과 지혜가 다르듯이, 사실과 진실도 다르다. 단순한 사실들을 한 올 한 올 엮어 겹겹의 진실을 만드는 일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더 이상 무지가 아니라 게으름이나 무관심 같은 것들이다.

  

 진실을 거저 얻기란 쉽지 않다. 지금까지 믿을 수 없거나 믿고 싶지 않던 진실들은 투쟁 끝에 얻어졌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진실은 보통 불편한 것들이다. 믿었던 권력, 국가, 또는 인간에 배신감을 느끼게하고 의문을 갖게 만든다. 지치지 말고 묻고 따지고 파헤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습관적인 믿음이 방관이나 방임이 되는 전환점은 생각보다 낮다. 진실을 부정하는 일은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치명적인 암막을 치는 것과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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