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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pr 09. 2017

다녀오겠습니다

지난 겨울 퇴사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신경쓰이는 것을 뒤로 한 채 떠나지 않는 여행만큼 시작이 좋은 여행도 없습니다. 무소속의 행복을 충만하게 느끼는 일은 긴 여행에서나 가능하지요. 나는 이런 자유가 오래가지 못할 거란 걸 알고, 다시 누리기도 어려울 거라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여행입니다. 


가고 싶은 여행지는 수두룩하지만, 어려운 고민 없이 행선지를 정했습니다. 가깝게 스친 적이 많았지만 들여다보지 못했던 두 나라, 독일과 폴란드입니다.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벨기에, 프랑크, 덴마크 등 인접한 나라들을 여행하면서도 나는 독일은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장기간 동유럽을 여행하며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를 지날 때 폴란드까지 올라가진 못했습니다. 독일은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며 보고 싶은 욕심에 아껴놓았고, 폴란드는 잘 몰랐기 때문에 마음이 가지 않았던 거죠. 


두 국가를 선택한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목적을 대라고 하면, 폴란드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수용소(Auschwitz-Birkenau Concentration Camp)를, 독일에는 유대인 박물관(Jewish Museum, Berlin)과 유럽 유대인 학살 추모관(Memorial to the Murded Jews of Europe, Berlin)을 보러 간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같은 영화를 보았고, W.G.제발트, 베른하르트 슐링크, 한나 아렌트 등을 읽었습니다. 어딘가에 반사된 상으로 보았던 비극 안으로 나는 가보고 싶었습니다. 음습함에 소름이 돋고 잔혹함에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체감이 가능한 근거리까지 가보고 싶었습니다. 머나먼 타국의 역사가 아니라 나의 삶과도 지척인 일상의 비극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 8월로 보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지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고, 독일은 극악한 가해국으로, 폴란드는 유럽의 최대 피해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폴란드는 독립과 민주 정부 수립 등 재건을 위한 저력을 발휘했고, 독일은 국제사회의 용서를 구하고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나는 잔혹했던 인간의 흔적을 보고, 감히 용서할 수 없는 그 범죄를 대하는 태도를 보러 가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과거를 보고, 지금을 생각하고, 내일을 감히 그려보고 싶습니다. 


오늘까지도 여행 계획을 짜는 대신 그들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준비에 열중했습니다. 역사를 훑고 문학을 읽고 음악을 들었습니다. 나름의 이유를 품고 떠나지만, 그곳에 도착하고 그들을 대면하고 나서야 여행을 떠나온 진짜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되겠지요. 얼기설기 엮기만 한 여행자의 어설픈 마음과 생각은 길 위에서 채우고 다듬겠습니다. 짐은 늘 그렇듯 단촐하게. 두려워하진 않지만 모든 걸음에 신중하게. 건강히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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