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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18. 2017

16-3. 아우슈비츠, 끔찍하고 끈질긴 잔해를 보다

폴란드 크라쿠프

 


 나치군은 수용소에 도착한 이들에게서 모든것을 빼앗았다. 가방이나 소지품은 물론이고 착용한 장신구와 안경테, 하다못해 금니까지 모두 압수해 재활용했다. 삭발은 필수였고 그들의 머리카락 또한 양말이나 스타킹, 카페트를 만드는 데 쓰였다.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 남부까지 밀려들어올 때 나치 군대는 수용소를 태워 그 곳의 파렴치한 증거를 모두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소각될 리 없는 규모의 범죄였다. 처리되지 못한 증거는 폐해 속에 살아있었다. 수용소에는 당시 발견된 수감자들의 소지품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유리벽 안에는 수백의 신발이 쌓여져 있었다. 멀쩡하게 보관된 여행가방은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기 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충분했다. 그들은 말끔하게 다린 옷 한 벌을 접고, 칫솔과 구두약을 챙겼다. 따뜻한 식탁을 꿈꾸며 식기도구와 티포트도 챙겼다. 당장의 내일에서 평화와 안정을 보장받을 수 없지만, 그들이 내리게 되는 어느 곳이든 그들은 삶을 이어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다. 소박하게나마 행복을 찾으려 했던 그들의 꿈과 희망은 무참히 버려졌다. 그 흔적들이 지친 모습으로 방문객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주인이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던 끈질긴 집념처럼, 그것들은 거기서 여태 살아있었다.  










 나는 시신들이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진이나 가스실의 모형을 보면서도 울지않았다. 차마 눈물이 나지 않는, 메마른 경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지품을 보는 순간 슬픔의 한계선이 무너졌다. 소지품의 주인들이 내가 아는 이들처럼 느껴졌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품은 소박한 꿈의 모양은 타인의 것처럼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명 한명이 나의 가족, 나의친구, 나의 이웃으로 다가왔다. 평범하고 친근한,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이 여기서 죽었다. 


그들은 불운의 사고를 겪은 것도 아니었고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당한 것도 아니었다. 눈먼 우월감과 비뚤어진 열등감.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됐고, 그들은 희생양이었다. 나치는 가장 보편의 윤리마저 저버린 극악무도한 범죄를 이어갔다. 마치 그것만이 그들의 비상식적인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퍼질 수 있었던 기반은 다수의 묵인과 방조였다. 만약 이 비극의 피해자들에 대해 운명을 운운하는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모든 잔해들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범죄였고, 인재(人災)였다. 남겨진자의 첫 번째 책무는 그 비극을 올바르게 정의하는 것이다. 원망하는 대상과 애도해야 하는 대상은 다르다. 



 수용소에서 나를 덮친 가장 큰 공포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 모든 비극이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우리 안에 그런 끔찍한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믿기 힘든 진실. 그렇기 때문에 이 재앙은 언제 어디서건 다른 얼굴로 되풀이될 수 있다. 인간의 경각심이 끝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고 신중해야 한다. 수용소 전시관 입구의 현판에는 George Santayana의 말이 새겨져 있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며칠 전 미국에서 극우단체의 폭력 시위가 보도됐다. 항의하는 맞불 시위대에 극우단체 청년이 차를 몰고 돌진하기까지 했다. 1명이 숨지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시위의 배후에는 KKK단이 지목되고 있다. 극단적인 백인우월주의가 다시 창궐하는 기세다. 시위대는 나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서로 나치식 경례를 나누고 ‘피와 땅’이란 나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유럽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나치식 경례나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처벌 받는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눈부신 정오의 햇빛 아래 거리에서, 끔찍한 짓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 내면에는 끔찍한 면이 있고, 그 씨앗이 악으로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어 두려움 속에서 지켜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수용소에 버려진, 그 끈질긴 희망의 잔해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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