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 - 시나브로

by 소금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을 뜻하는 순우리말. 유사어로는 '은밀하게', '살금살금' 등이 있다.




시작부터 엉망진창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나와 지하철역으로 걷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렇게 습할 거면 차라리 비가 오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흐릿한 하늘, 세상은 채도가 낮았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쯤이었다. 가방에 손을 넣었는데 아무리 뒤적여도 내가 찾는 가죽 질감이 없다. 관성처럼 뻗어나가던 다리를 붙들고 우뚝 섰다. 눈을 가방 안으로 옮겼다. 없다.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집까진 왕복으로 거의 1km. 시간이 별로 없었다. 뛰어야만 했다.


지갑을 들고 겨우 탄 지하철은 콩나물시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침에 샤워는 괜히 했다. 땀이 눈물처럼 흘렀고, 터져버린 땀구멍은 진정을 몰랐다.


상부에 올린 기획안은 대차게 까였다. 별로 우울할 일도 아니었는데 우울하기만 했다. 마침, 창밖으로 비가 내렸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반가워서 잠깐 넋 놓아 바라봤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는 우산. 아, 나 우산 없는데.


퇴근할 땐 그칠 줄 알았다. 그 말이 우습게 비는 땀처럼 주룩주룩. 편의점이 보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가방을 꼭 쥐고 온몸으로 맞았다.

생각보다, 아니 엄청, 시원했다.

비를 피하는 건 불쾌한 일이지만, 맞서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단념한 듯 웃음이 났다. 별거인 하루인 줄 알았는데, 시나브로 별거 없는 하루가 되어버렸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건물 유리 너머의 나를 봤다. 푹 젖은 생쥐 꼴이었다. 그 모양이 웃겨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엉망진창. 그 어떤 것도 짐작할 수 없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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