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의 손에는 시집 한 권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언뜻 펼쳐진 시집은 작았지만 책 속에 담긴 언어들은 봄날인 듯 따뜻했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신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15 초‘에서)
군인답지 않게 감성 깊은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가난한 내면에 양식을 주려는 뜻일 것이다.
몸은 푸른 제복에 갇혀 있었지만 영혼은 늘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어하는 녀석이었다.
그는 고대하던 휴가를 나오기 전부터 5일이라는 짧은 휴가 계획을 세웠다.
부산에서 친구를 만나고 하조에 가서 이모들에게 인사하고 여수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며 ......
우리는 그가 짜놓은촘촘한 스케줄에 맞게 일정을 조절해야 했다.
새롭게 놓여진 5일간의 자유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그를 보면서 내게 미리 정해진 약속쯤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아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흔쾌히 약속을 미루어주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떠났고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서두르듯 차를 몰았다.
그러나 집사람은 아들이 지금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거라며 슬며시 나의 조급함을 눌러주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은 멀리 스쳐 지나는 산에 쌓인 눈까지 녹이고 있었다.
며칠 전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강력한 추위는 과연 얼어붙은 나무들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 몹시 걱정스러웠는데 오늘은 그런 염려마저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녀석은 실내 구석진 자리에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혼자만의 시간을 음미하며 더 느긋해지려는 듯 책을 펼치고 있었다.
혼자서도 시간을 즐길 수 있고 목마른 것을 스스로 구하는 듯한 그의 옆모습이 나를 안도케했다.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도시에 살다가 이곳 산 속으로 이사왔을 때 우리집 아이들은 산속에는 없는 것이 너무 많으며 눈 앞에 보이는 푸른 자연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라며 당장은 두고 온 친구들과 눈에 선한 학교, 한데 모여살던 여러 집들과 자주 드나들던 공원 등 그런 것들을 그리워했다.
산 속 생활에서의 불편함과 외로움이 때론 그들의 강한 불만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들은 모두 도시에 있다고 투덜거렸지만 실은 중요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것들이 산 속에 얼마나 많은 지 아이들은 깨닫지 못할 뿐이었다.
없어도 될 것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많은 것들 속에서 그들은 이미 바르게 커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느끼지 못했다.
산촌의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전해지는 희망적인 자극과 격려, 맑음과 생동감, 그들에게서 비롯되는 넓은 상상은 도시의 죽어있는 것들의 경직과 막힘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이들이 도시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멀리 있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산 속에서의 쓸쓸함 등, 당장의 간절함과 부족함들이 장차 그들의 생각을 넓혀가는 데 좋은 재료가 되어주길 바랐고 당연히 그렇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주는 데에 탄탄한 한 뼈대가 될 것이라 믿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중인 녀석이 요즘은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어떤 때는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응접실에 쌓인 책만을 읽으며 주어진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요즘은 군에서 틈날 때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고 있는데 내용은 물론 절묘한 표현까지 가슴에 닿아 몹시 행복하다는 녀석의 말처럼 정말로 글을 써야하는 게 아닐까 ?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남자는 군대 가서 춥고 배고프고 쓰라린 과정을 견뎌야 크고 여문 사람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음 한 편으로는매서운 추위에 고생하는 것보다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이는 것을 보면 내 안에 자리한 이중적인 사고가 민망스럽기도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생겨 난다며 앞날에 대한 희망을 키워간다는 사실이다.
당장은 힘들지만 스스로 긍정으로 이겨내려는 생각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앞으로도 수없이 맞부딪히게 될 여러 갈등과 번민의 순간을 통과하며 걸러지는 알맹이가 단단하고 반듯한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뿌리내리길 바란다.
이제는 좀 더 멀찍이 서서 초연하게 그의 성장을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설령 잠시 길을 벗어나더라도 언젠가 다시 제 길을 찾아 돌아오리란 그런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