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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Dec 13. 2022

화초들이 내게 주는 것들

   

바람이 분다. 

앞산에  서있는 나무들이 흔들린다.  긴 나무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듯 휘청거린다. 나무들 사이로 우우!하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바람이 내뱉는 소리인지 나무들이 부딪히는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바람이 지나는 곳마다 파문이 일고 잠잠했던 시간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겨올이면 난폭한 바람이 언제  우리의 평온을 깨트릴지 가끔  염려스럽다. 그래서  아침이면 창을 열고 나무에게서 바람의 존재를 확인하곤 한다.  

     

겨울은 추위를 피해 갈 곳이 마땅치 다.  오라는 곳도 갈만한 곳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하릴없이 집안을 어슬렁거리곤한다. 그러다가 요란스럽게 낙엽을 쓸고다니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듯한 낙엽들 처량한 울음 소리를.......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아차! 꽃화분들을 안으로 치우는 일을 깜박했던 것이.

본래 실내에 두는 식물이지만 산 속이라 밖에서 햇볕도 쐬고 비바람도 맞으며 야생화와 잘 어울리던 꽃들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추위를 피해 서둘러 옮겨놓았을 텐데, 갈수록 깜빡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내가 바보스럽다. 나의 무관심 때문에 이미 누렇고 검게 변해있는 화초들을 보니 미안하고 속상했다.


부랴부랴 크고 작은  화분들을  안방으로 옮겼지만 자리가 부족했다.  아직 선택받지 못한 채 남아있는 화분들이 신경이 쓰였다. 못 본 척하기에는 긴 시간을 공들이며 피워냈던 꽃들의 자태가 눈에 선했다. 철이 지났다고 살아있는 것들을 그대로 죽게 버려둘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화분만 버리고 화초들은 큰 용기에 함께 담았다. 좁은 공간에 서로의 몸을 맞댄 그들을 모두 안방으로 옮기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없어 휑했던 안방의 창가는 그들의 피난처이자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옹기종기 몸을 맞댄 채 고개 숙인 그들의 모습을 보니 어릴 적 우리 가족이 함께 지냈던 단칸방이 생각났다. 방이 좁다 보니 가끔 서로를 밀쳐내기도 하고 작은 이불을 서로 당기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을 맞대고 있으면 한결 따뜻해져서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그렇게 겨울밤을 지내다 보면 모르고 지냈던 형제들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헤아릴 수 있었다. 단칸방에서 함께 보내었던 시절은 추웠지만 가족이라는 따뜻함과 소중함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제는 화초들과 한방에서 체온을 나누며 지낼 겨울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렌다. 가끔 창을 흔들며 지나는 찬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들과 따뜻한 방에 있다는 사실에 새로운 행복감이 묻어나왔다. 행여 놓칠뻔했던 막차에 간신히 올라탄 듯한 다행스러웅도 함께...........

        

화초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전에 없던 애정이 생겼다. 문득문득 그들에게 시선이 가기도 하고 마치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손길은 세심하고 조심스러워졌다. 그들은 하늘도 바람도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든 낯섦을 이겨내고 있었다. 실내라서 그런지 화분의 물은 금방 말랐다. 며칠에 한 번씩 물을 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수척해 보이던 화초는 생기를 찾곤 했다. 커튼을 열어 밖의 햇빛을 끌어오고 따뜻한 날이면 창을 열어 바람결도 느끼게 해 주었다. 방으로 옮겨온 지 열흘쯤 지나자 한동안 경직되어 있던 화초의 잎들은 긴장이 풀린 듯 반들반들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동안 낯설어서 어울리지 못하고 뾰족했던 마음들이 오랜 긴장의 끈을 늦추는 듯했다. 그들은 안방이 이제는 제집처럼 편안하고 익숙해진 듯했다.  

        

엊그제 화초에 물을 주다가 언뜻 줄기 한가운데가 볼록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살펴보니 놀랍게도 누런 잎들이 떨어진 마디에 깨알 같은 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새싹들은 당장이라도 줄기를 뚫고 나올 듯 단단했다. 혹시 그동안의 나의 관심과 손길이 힘이 되었을까? 몸이 따뜻해지니 다시 힘을 내어 살기로 한 것일까? 갑작스러운 새싹들의 출현에 궁금증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그들이 잘 적응하며 힘차게 살고 있는 듯해서 기뻤다. 처음에는 힘겨워하는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들이 의지 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싶었다. 그러나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 생명 있는 것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방에서 겨울을 견디는 화초들은 단순히 방의 빈자리만 채운 것이 아니라 어느덧 내 마음속 허전했던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눈이 간다.  한결같은 모습을 내 두 눈에 담아둘 수 있어 좋다. 추운 겨울에도 푸르게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내가 잠들거나 자리를 떠나 있어도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나를 바라봐주는 그들이 있어  위안이 된다. 창밖의 온도는 차갑지만 마음 속 온도는오히려 높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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