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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시간」이라는 테마

by 심재훈

요즘 ‘시간’이라는 테마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는 걸 보게 됩니다. 방영 중인 「시지프스」라는 드라마도 이런 시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야기가 진행되는 걸로 보입니다. 여러 문학공모전에서도 ‘시간’이라는 주제를 한 소설들이 한창 유행하고 있습니다. 영화 쪽에서는 뭐, 말할 것도 없지요.


도대체 사람들은 왜 ‘시간’이라는 주제에 열광하는 걸까요? 제 생각엔 지금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경향이 옛날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아마 그 마지막 시대 끝에 아주 가까워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 확신할 순 없지만요. - 인류가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지는 벌써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기보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릅니다. 지나간 과거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보다 더 오래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역사는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처럼 너무 높아져 우리가 함부로 고개 들어 쳐다볼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인류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더 많은 교훈과 통찰을 얻어낼 것입니다. 역사가 남긴 상처들과 교훈들이 도리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거죠. 우리는 이제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과거의 문제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며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과거’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영화계에서 ‘시간’이라는 테마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아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일 것입니다. - 여기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실 겁니다. - 「메멘토」, 「인셉션」에 이어 「테넷」이 상영되면서 ‘시간’이라는 테마가 영화라는 매체에 얼마나 잘 녹아들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시간의 순행이 사람의 노화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우리는 시간이 언제나 순행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 이론이 대두되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 그저 우리는 우주의 어떤 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이고 환경이 변화한다고 느끼는 건 우리의 뇌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논문도 있습니다. SF 영화 「컨택트」는 우리가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컨택트」에서는 언어 결정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건 하나의 세계관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거죠.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관념들을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언어를 배우면 거기엔 언제나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끝 – 인류에겐 종말 - 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는 거죠. 인류의 시작과 끝을 아는 마당에 ‘시간’은 더 이상 무의미한 개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신이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의 언어가 정의해버린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언어체계가 완성되면 이야기 하나가 창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 처음을 맞이하고 곧 끝을 마주하게 됩니다. 모든 건 이미 결정됐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 아침에 무얼 하고 누구를 만날지도 모두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우리에게 시간은 더 이상 중요한 게 되지 못합니다. 물론 저는 이 의견에 모두 동의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우리가 이와 같은 새로운 질문을 가질 수 있다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시간이 더 이상 순행하지 않고 역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를 향해 눈을 두고 있느냐입니다. 저는 점점 지나간 과거를 향해 제 눈이 돌아가고 있음을 아주 불가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제 내면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라고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히어로들은 한 번의 실패를 겪고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양자역학 패러다임을 사용해서 타노스와 마지막 전투를 다시 벌입니다. 그들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다시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리하죠. 「테넷」에서 주도자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회전문을 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영화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영화를 통해서 경험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찬양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시간이라는 테마를 통해 영화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건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테드 창 소설들을 참 좋아합니다. 여기서도 시간여행 테마가 등장하는데 저는 놀란 감독이 분명 이 소설들을 참고했으리라 봅니다. - 테드 창 소설 『숨』에선 회전문과 평행우주론이 똑같이 등장합니다. 「컨택트」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 문학적으로도 시간이라는 테마는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건 앞으로 터질 미래의 문제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들이지요. 수많은 미래 영화들은 사실 과거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인해 벌어지는 미래를 그리는 것뿐입니다. 과거에 영향받지 않는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적해있는 과거를 메우느라 바쁘게 될 것입니다. 영화는 단지 안내자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영화는 그저 특정 과거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거기엔 떡이 진 피와 상처와 아픔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곤 우리는 깨닫죠. 아직 우리 안에 해결될 게 남아있다는 것을요. 갑자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어 지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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