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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일주일(5)

Ⅴ. 숭고한 얼굴, 문화

by 심재훈

* 이 글은 2020년 2월에 런던을 여행하고 나서 쓴 수필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존재와 달리 인간에게만 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의무가 있는 걸까? 사실 그것이 의무이기보다는 인간이 문화를 지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시대가 지날수록 인간은 생계를 위해서 일과 노동을 위한 희생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예술·미학적인 체험을 위한 시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문화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얘기가 옳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전보다 더 바쁘다는 건 당연한 사실처럼 보이지 않는가? - 그만큼 뛰어난 예술가의 그림이나 작품을 보면서 예술적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 것이다.

기술발전에 대항하여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은 이런 예술 지향적인 관점에서 타당하다. 그린피스나 기후프로젝트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자연보호 활동은 어떻게 보면 수동적 입장에 서 있는 자연의 예술적 가치를 보존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는 이렇게 예술적 감흥을 느끼고,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미래의 인간에게 미술적·예술적 감각이 상실된다고 가정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을 돌볼 수 있는 휴식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문구가 있고, 불교에서는 속세를 등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나 자신을 맡기고, 그것대로 느끼고 감상해보라는 종교적인 권유도 이 시대 속에서는 그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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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감흥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기보다는 작품과 공연, 연주를 보면서 느끼고, 흘릴 수 있는 눈물과 비슷하다. 격정적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을 느끼며 감동하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이다. 우리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바흐의 「예수, 인간 기쁨의 소망」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문화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고상한, 위대한, 신성한 가치들을 흠모하고 추구하고자 한다. 고상함과 신성함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 어쩌면 그 자체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욕구를 대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내면 안에 숨어 있는 신성함(Divinity)에 대한 갈증은 일상생활 중에 ‘’ 또는 ‘품위’으로 표현되고, 보인다. 우리가 어렸을 때 영어의 기초를 배우다 보면 ‘격’이라는 문법을 배우게 된다. 여기서 주격, 소유격, 목적격과 같은 개념을 배우는데, ‘격’이란 존재와 사물의 위치나 위상을 지칭한다. 우리는 연예인들의 멋진 패션 차림을 보면서 그들만의 아우라(Auora)를 느끼기도 하고, 차별화된 격을 느낀다. 굳이 외모와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도덕적인 성품과 품격을 보면서도 비슷한 신성함을 느낀다. 나는 런던 여행 속에서 세인트 폴 대성당의 장대함에 압도되는 체험을 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연례행사처럼 우리는 왜 그토록 TV에서 하는 납량특집의 귀신 이야기를 굳이 찾아보려 애쓰는 것일까?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귀신의 신성함에 매력을 느껴서가 아닐까?

누구나 살면서 타인에게서 이 신성함을 발견하지만, 개인 스스로 나 자신의 신성함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 자신과 타인, 주위의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면서 존재의 신성함을 느끼고자 하는 활동, 그것이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의 TV 속의 예능 프로그램이나 정치계의 활동 모습들을 보면 자기 비하 적 또는 자기 파괴적인 이미지를 출연진이나 경쟁하는 정치인들에게 서슴없이 허용하는 모습이 너무 자주 보인다. 마음 한 곳엔 안타까운 감정이 든다. 문화의 순수한 측면들을 알고 있고, 그 모든 문화 활동의 목적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문화 활동의 고상한 성격을 드러내는데 미디어 업계가 새롭게 각성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렇게 문화의 숭고한 면들을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다면,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문화를 가꾸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은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본능에 반응하지 않고, 한 차원 높은 가치를 위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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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인간은 숭고한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안에는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숭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인간은 과거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반성하기도 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한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 하는 일련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 사고할 수 있다. 인간 외에 다른 생명체는 이렇게 인간과 같이 사고할 능력이 없다. 동물과 식물은 한 대상을 향하여 1차원적인 욕구만 성취할 수밖에 없다. 사자는 사슴이라는 먹이를 보고, 자신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사슴을 쫓는다. 여기서 사자의 갈망과 사고는 오직 ‘배고픔’에 묶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식이 굶고 있다면, 자신의 ‘배고픔’을 감수하더라도 자식에게 자신의 먹을거리를 내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의 배고픔을 해소’해주고자 자신의 ‘배고픔’을 참아낼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1차원적인 욕구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을 고려하여 2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관중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존재한다.

물론 원숭이 부모 또한 원숭이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남겨두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깨달은 교훈들을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교훈들을 현재의 순간에서 적용할 수 있다.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동물도 오랜 시간을 통해 습관을 형성하고, 환경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신체를 변형하기도 한다. 동식물들은 자신의 외형적 진화 및 변화 과정을 온전히 환경에 의존한다. 환경이 바뀌면 동식물 자신들도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외형적·내면적 변화를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편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외형적 모습대로 자신을 가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염색도 할 수 있고, 운동을 함으로써 체중을 감량할 수도 있다. 인간은 환경에 따라 적응도 할 수 있지만, 환경을 역행하여 자신을 바꾸어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인간은 단순히 문화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문화를 바꿀 수도 있고, 보존할 수도 있다. 사실, 문화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에 가깝다. 인간의 이러한 창의적인 행위는 우리의 삶 속에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준다. 동식물들을 환경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환경의 명령을 거스르고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세상 속에 반영할 수 있다. 어쩌면 문화란 인간의 이러한 창조행위로 치환될 수 있다. 환경은 오직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야생마라면, 문화는 모든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는 풍선과도 같다. 동물과 식물은 이 환경이라는 야생마 위에 올라타 시간의 방향에 따라 질주하는 운명론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환경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기 때문에, ‘과거’를 단순히 흘러간 찌꺼기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과거’를 이미 밟아버린 계단으로 여기며 과거 속에서 교훈을 뽑아낸다. 동식물들이 1만 년, 10만 년 단위로 큰 진화(외형적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면, 인간은 개혁과 변화의 주기를 효율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 인간은 기술 발전과 지식 진보를 통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형적 또는 내면적으로 자기 자신을 갱신한다.

따라서 문화는 인간의 두 가지 탁월한 속성을 통해서 한층 발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이 과거 – 현재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간은 시간의 운명을 역행할 수 있는 능동성(initiative)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창의적인 선택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례 없는 업적이나 역사를 써 내려간다.

문화는 이러한 인간의 업적과 역사를 통해서 탄생하고 발전한다.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서 형성되는 것이 문화이기에, 문화는 다양하게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문화가 이렇게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이 자유라는 가치를 사모하고 자신이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혼돈과 불안.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불가지함과 불규칙성. 인간의 욕망엔 끝이 없고 딱 정해져 있지도 않기에 우리는 매일 서로 다른 모습의 하루를 받아들이고 맞이하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위대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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