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s Anderson ; 색깔. 서정성. 포스터 >
아이들이 정말 즐거워할 수 있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면 앤더슨의 영화이지 않을까. 알록달록하고 대칭적인 세계. 포스터만 놓고 보면 앤더슨이 최고인 것 같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처럼 예쁜 포스터가 또 있을까. 분홍색 색감과 인형 같은 질감이 매혹적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둡고 잔인한 누아르와 미스터리 물을 좋아하는 나로서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한 줄기 빛과 같다. 가끔씩 나에겐 이런 서정 짙은 장르들이 필요하다. 최근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이 보고 싶어 지는 이유다. 가족, 청소년, 청춘. 이런 테마들이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고레에다 말고도 그레타 거윅, 타이카 와이티티 같은 감독들도 눈여겨보고 있다. 왜냐하면 「작은 아씨들」과 「조조 래빗」을 너무 재밌게 봤기 때문이다.
색감만으로도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다.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저런 색깔도 존재하는 구나를 덩달아 느낀다. 「문라이즈 킹덤」(2012)은 청소년이라는 시기가 얼마나 예민하고 민감한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한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나기 위해선 가족과 이웃, 지역 공동체의 헌신이 필요하다는 걸 이 영화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아이들도 어른처럼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어른들이 세상에서 가장 쉽게 하는 착각은 바로 아이들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다. 어른들은 자꾸 아이들이 자신들의 밑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들도 이미 세상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잘 안내해줄 의무가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문화부 장관을 지내셨던 이어령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한 곳을 향해 달려가면 1등부터 꼴등까지 나눠지지만,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방향대로 걸어가면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천천히 돌아본다. 아이들이 자꾸 엇나가는 이유는 아이들이 특별히 잘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어른들 잘못이다. 아이들이 이런 획일화된 세상에서 자라도록 방치한 잘못이다.
「문라이즈 킹덤」에서 샘은 수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둘이 도망친다. 샘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수지의 젖가슴을 만질 때 얼마나 웃기던지. 이렇게 그 장면을 비웃고 있는 나도 어느새 꼰대 대열에 합류하는 것 같아 오히려 부끄러워진다. 저 장면만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내색하진 않지만 세상의 구석구석을 다 알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성(性)과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도 …. 아이들은 이미 세상의 모든 사물을 보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는 그 사물의 속성과 질감을 파악한다. 그러니 어른들은 무언가 감출 생각 따위 하지 마라.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보고 나면 어디론가 슝 여행을 떠나고 싶어 진다. 모르겠다. 내 방과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기껏 해봐야 강남과 신촌, 이태원 거리를 잠깐 걸어 다니는 것뿐이기에, 세상을 담아내는 내 스펙트럼이 얼마나 좁고 협소한 지를 알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흰색이 흔한 곳으로 떠나고 싶다. 노르웨이의 피오로드(Fjord)라든지 핀란드 헬싱키 같은 곳으로. 하얀 설원이 있는 북유럽을 자꾸 떠올리는 건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소설을 읽은 탓인지(거기선 헬싱키가 배경이 된다), 앤더슨 장르에 자극받아서 그런 건지 …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걸 보느냐에 따라 그날의 행불행이 결정될 만큼 보는 것에 집착한다. 정확히는 어떤 색깔을 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본다는 건 마치 내 안에 예술성을 끄집어내는 행위 같다. 색깔은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가져다준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내 옷장엔 항상 청자켓이 걸려 있다. 초등학교 졸업사진에도 나는 청자켓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눈의 왕국, 핀란드에 가고 싶어 진 건 어쩌면 가로로 누워있는 남색 십자가와 흰색 도화지가 내 시선을 빼앗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특히 파랑에 가까운 저 남색 무늬. ‘풀꽃 시인’ 나태주 선생님도 이렇게 말하셨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그리고 너도 그렇다.
정말 당신도 그렇다.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초록색 잎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하얗고 붉은 벚꽃은 이미 다 졌다. 올해엔 유난히 더 빨리 진 것 같다. 색은 내 눈을 더 맑게 해 준다. 그래서 더 중요하다. 앤더슨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2020)가 나왔다는데 국내에선 아직 개봉하지 않은 것 같다.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눈과 마음을 서정(抒情)으로 충전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