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플래쉬」의 마법

by 심재훈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대머리 지휘자 선생의 욕지거리와 신의 분노를 상징하는 듯한 자글자글한 주름이 어떤 강력한 권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 이는 앞에서 말한 「블랙 스완」과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미칠 듯이 목표와 광기에 집착한다. 예술 세계, 특히 음악은 너무 민감해서 예술이 사람보다 앞설 때가 많다. 그런데 휴머니즘을 상실한 예술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한다는 건 폭탄을 해체하는 군인처럼 섬세한 능력이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 음악가들은 야행성 동물이다. 이들은 드라큘라처럼 남들이 자는 새벽녘에 일어나 피아노와 음표를 만진다.


「위플래쉬」는 재즈음악을 다루고 있다. 찰리 파커와 쳇 베이커는 약물 중독자였다. 그들은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 약물을 했다. 그들의 연주는 천사의 노래 같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악마와 같았다. 나도 때로는 찰리 파커의 「더 버드」라든지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을 듣는다. 그 감미로운 연주와 목소리. 마일스 데이비스와 쳇 베이커의 라이벌쉽을 들어보면 정말 끔찍하다.


「위플래쉬」는 ‘푸시(push)’의 미학을 다룬다. 상관이 밑에 있는 사람에게 명령하듯이 압박감은 우리를 한 단계 성장시키기도 한다. 공부를 하는 거나 음악을 하는 거나 이에 대해선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푸쉬’에 의해서 공부에 매진했던 나날들. 그 날들을 버티고 또 버텼다. 포기하고 싶을 때쯤 수능을 보았다. 그날들은 나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좋은 것도 있었고 나쁜 것도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푸쉬’는 우리의 삶에 자양분이 될 때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오히려 후회와 회환으로 남게 될 때가 더 많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못했을 때가 가장 후회스럽다. 물론 인생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겠지만, 마음이 이끌어 가는 대로 선택한다면 그래도 최소한 후회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이 「위플래쉬」의 마법이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작용했으면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1984)에서 모차르트는 제시간에 곡을 마감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요절하고 만다. 그를 질투했던 살리에리는 ‘푸쉬’함으로써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영화는 영화로만 남도록 내버려 두자. 「위플래쉬」도 음악적 절정에 치닫는 하나의 성장영화로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카라반」이 더 아름답게 들리기 시작하지 않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라이언 고슬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