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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F Jun 21. 2024

사랑은 감탄과 이해의 반복

Episode 20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순간을 채우는 프리랜서, 김기수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다양한 일과 삶의 이야기를 글과 영상을 통해

세상에 전달하는 인터뷰팀 ONF입니다.   

   

한 사람의 ON과 OFF를 함께 조명하며

그 고유한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 ONF의 의미이자 목적입니다.   

   

ON: 직업, 일. 사회적 시선에 노출되는 대외적인 모습의 ‘나’

OFF: 일을 제외한 일상, 휴식, 다소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의 ‘나’




Episode 20: 사랑이 깊은 시선으로


무언가를 다양하게 좋아하는 사람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처음 그를 알게 된 건 3년 전 그의 SNS 계정을 통해서였다. 좋아하는 잡지사의 에디터라 무작정 팔로우하게 된 그의 피드는 다양한 관심사로 가득했다. 이소라와 카펜터스, 그가 즐겨 듣는 듯한 가수들의 무대 영상과 함께 일 면에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비롯해 그의 취향이 묻어나는 영화 속 장면들이 칸칸이 채워져 있었다. 그가 다녀온 여행지 또한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일반 카메라도 아닌 캠코더로 여행지를 기록하는 방식 또한 흔한 건 아닐 것이다.


그가 좋아하게 된 모든 것들엔 그의 어떤 마음이 새겨져 있을까. 다채롭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어쩌면 방향도, 갈피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마음과 달리, 그의 이야기는 어쩐지 단 하나의 시선으로 통하고 있었다.


적은 수의 몇 단어만으로도 삶을 커다랗게 부풀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그의 세계 안 작은 일부를 ONF가 들여다보고자 한다.




안녕하세요, 기수 님. ONF의 글을 읽고 계실 분들을 위해 간단한 인사와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전직 잡지 에디터이자 편지 가게 스태프, 그리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며 일이 없을 땐 백수로 지내고 있는 김기수입니다. 최근엔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이라는 책을 펴냈어요.





What's your ON?


Q. 처음엔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컨셉진>에서 에디터로 일을 시작하셨죠. 3년간 일하셨던 그곳에서 기수 님은 주로 어떤 이야기와 콘텐츠를 만드셨나요?

 

<컨셉진>은 독자분들의 일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돕는 월간잡지에요. 밑줄을 그어야 할 부분은 ‘조금 더’인데요. 당장 실현이 불가능한 것들을 제안하기보다는 아주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산책이나 살림, 여유와 같은 소소한 주제를 통해 일상의 새로운 관점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거죠. 매 주제에 맞추어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색다른 아이템을 소개하기도, 영화나 작품을 추천하기도 해요. 회사의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보니 주제 선정부터 취재하고 글을 꾸려나가기까지의 모든 부분에 참여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는 미숙한 에디터였기 때문에 편집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직접 선택하고 책임지는 영역이 늘어갔던 것 같아요.



- 매번 새로운 주제에 맞춰 새로운 장소와 이야기, 사람을 소개하려면 그만큼 취향의 스펙트럼이 넓어야만 할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경험하고 좋아해 왔던 것들에서 영감을 끄집어낸 적도 많지만, 그 곳간을 계속해서 채워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고갈되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더구나 일상을 다루는 잡지이니만큼 일상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이야깃거리를 계속해서 발굴해야 했죠. 그래서 주말엔 가만히 있질 못했어요. 열심히 놀러 다니고, 새로운 전시나 공간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지요. 그게 꼭 싫지만은 않았지만 약간의 강박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에요. 음악 사이트에 들어가면 새로 발매된 앨범 목록이 있잖아요. 그럼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몇몇 노래들을 꼭 들어봤어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다양하게 접하고 감각한 덕분에 좋은 것들에 대한 감도가 높아졌어요. 무엇의 어떤 면이 좋은지를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달까요.


<컨셉진>


Q. <컨셉진>에서 운영하는 에디터스쿨의 1기 수강생으로 참여하였다 우연한 계기로 에디터가 되셨다고요.

 

대학생이었을 때 에디터스쿨에 참여했는데요. 고등학교 때부터 저는 무얼 해야겠다는 뚜렷한 확신과 목표가 있는 편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걸 찾기 위해 열심히 매달리지도 않았고요. 그저 막연히 글과 콘텐츠를 좋아했기에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죠. 그런데 신방과에서 배우는 글이 제가 쓰고 싶은 형태의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찰나에 잡지에 눈이 간 거예요. 하지만 어디에도 잡지에 대해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죠. 그때 마침 제가 즐겨보던 <컨셉진>의 에디터 스쿨 공고를 보게 되었고,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상태로 망설임 없이 참여했어요.


매주 과제가 주어지면 학교 과제도 미뤄두고 거기에만 매진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처음으로 에디터는 단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기획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당장 글에 활용할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어떻게 하면 아이템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전체 그림을 스케치하는 것이 에디터의 몫이더라고요. 그게 참 어렵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이 일이 재밌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던 건 마지막 과제인 인터뷰를 하면서예요. 당시 엄마를 인터뷰하며 가깝다고 생각했는데도 미처 몰랐던 엄마의 이야기들을 너무나 깊숙이 알게 되었죠. 그때 인터뷰가 참 매력적이라는 걸 느꼈어요. 다행히 저의 글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컨셉진에서 먼저 제안을 주어 에디터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컨셉진(미션캠프)에서 운영하는 에디터스쿨은 약 한 달간 에디터 업무에 관한 이론 교육과 함께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해 볼 수 있는 강의를 제공한다)



-그럼 에디터로 일하며 인터뷰한 수많은 사람들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분이 있을까요?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따로 있다기보단, 저의 일상 곳곳에 그 사람들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와 기억이 스미어있단 걸 느껴요. 저희 잡지가 일상에 근접하게 맞닿아 있다 보니, 그것과 관련한 인물을 정말 다채롭게 만났어요. 그래서 일상에서 그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더라고요. 예를 들어 살림이 주제였을 때 인터뷰했던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살림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다.’ 설거지하고 청소하기가 무척 귀찮았던 어느 날, 이 말이 떠오르면서 몸이 움직여지더라고요. 아, 그때의 수많은 만남이 내 안에 잔뜩 남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Q. 지난 1월엔 책을 출간하셨죠. 노포에 대한 기수님의 애정과 기억을 꾹꾹 눌러 담은 책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을 쓰시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네요.

 

잡지 안에 매달 에디터가 가진 기호와 취향에 대해 온전히 써 내릴 수 있는 칸이 있었는데, 그때 제가 좋아하는 노포에 대한 글을 썼어요. 그 글을 보고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을 주셨죠. 사실 처음엔 많이 망설였어요. 제가 살아온 날보다 훨씬 오래된 노포들이고, 그곳을 먼저 찾기 시작했던 어른들에 비하면 제가 가진 추억은 그저 새 발의 피일 텐데, 제가 감히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꼭 그 분야의 전문가만 글을 써야 하는 건 아닐 수 있겠더라고요. 게다가 편집자께선 노포를 매게로 한 저, 김기수의 이야기를 써보자 하셨거든요. 아직 미숙한 저의 이야기라도 어쩌면 보탬이 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잡지 기사 몇 개를 쓰는 것과 스무 개의 챕터로 묶인 한 권의 책을 쓰는 건 정말 다르더라고요. 시작하고 완성하기까지 무려 2년이 걸렸어요.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날짜에 보내지 못한 적도 많고요. 또 막상 쓰다 보니 갈수록 고민이 깊어지기도 했어요. 제가 노포를 좋아하는 이유를 명확히 찾아야만 했거든요. 저는 그냥 노포의 허름한 분위기가 좋아요, 그런 내용만으로 책 한 권을 채울 수는 없잖아요. 또한 긴 세월을 버텼다는 사실만으로 노포가 모두 좋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내가 노포를 찾는 이유, 그걸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느라 오래 걸린 것 같아요.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


-결국 책을 쓰며 그 답을 찾으셨나요? 노포에 대한 기수 님의 애정은 어디서 비롯된 걸지요.

 

에디터로 일하며 주위의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큰 아쉬움과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한때는 멋있다고 여겨졌던 공간들이 몇 년 사이에 촌스러운 것이 되어 버리고, 심지어는 사라지기 일쑤였거든요. 반면에 퇴근하고 찾아가는 노포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죠. 거기서 큰 안정감을 느꼈어요.


나는 오래된 간판을 좋아한다. … 시간이 쌓인 맛을 혀로 느끼는 건 감미롭다.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은 따뜻하다. …. 그러니까 나의 취미는 노포가 아닐까.”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 p. 58


저의 책을 읽고 다른 분들도 그런 공간 하나쯤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꼭 제가 소개한 노포가 아니더라도, 각자만의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무언가‘를 찾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어요. 어릴 적 부모님과 자주 방문했던 동네의 식당처럼, 각자의 추억이 담긴 것들을 떠올려보고 그 공간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느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요.


노포, 을밀대 평양냉면 / 소다만식품



Q. 책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유난히 애틋했던 글이 있나요?

 

할머니에 대해 썼던 편이 기억에 남아요. 단순히 할머니께서 제게 남겨주신 사랑에 대한 글이었다면 쓰기 쉬웠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 할머니와 아버지,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케케묵은 상처에 대한 글이었기에 조금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랑에 대한 글을 쓰는 것보다 미움에 대한 글을 쓰기가 더 힘들더라고요. 새어머니의 아래에서 자라 온 아버지의 상처, 그리고 한 세대를 거쳐 저에게까지 전달되어 온 그 상처와 설움을 단 한 번도 직접 꺼내어 본 적이 없었는데요. 막상 글로 풀어내고도 솔직히 후련하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셨죠.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난 분명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지금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어쩌면 얼마 전 할머니에 대한 미움을 글로 털어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름 제 안에선 할머니와 화해를 했었나봐요. 그래서 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후 완성해 놓았던 글에 몇 문장을 덧붙였어요. 거기까지 쓰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던 생각이 나네요.



Q. 책 곳곳에서 드러난 아날로그적 사랑의 연장선상인지, 편지 가게 스태프라는 조금은 생소한 이력도 갖고 계세요. 에디터 일을 그만둔 후에 기수 님이 일하셨던 편지 가게는 어떤 곳이며 그곳에선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연희동과 성수에 위치한 ‘글월’이라는 곳인데요. 편지, 편지와 관련된 제품, 그리고 편지를 엮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 펜팔 서비스와 같은 과거의 것들을 어떻게 지금의 시점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곳이기도 해요. 저는 가게를 보는 스태프로 시작해 후엔 브랜딩과 관련된 일을 맡아 했어요. 편지 가게에서 내보내는 제품 소개 글, SNS 등 각종 텍스트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맡았죠.


원래도 편지를 참 좋아했어요. 말로는 꺼내기 어려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동시에 말로 하면 사라지고 말 생각들을 오래 붙잡아둘 수 있잖아요.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도 다 간직하고 있거든요. 이따금씩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깜짝 편지를 전해주기도 하고요. 편지 가게에 찾아오신 분들도 다 저와 비슷한 분들이셨어요. 어딘가 편지를 꼭 닮은 분들이었죠. 친구나 애인, 부모님께 줄 편지를 신중하게 고르려는 마음이 얼마나 다정한가요. 그 덕에 일을 하는 시간 줄곧 되레 행복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편지가게, 글월



부유하는 말과 마음을 붙잡아 둘 오래된 편지, 마음 놓고 추억을 쌓아둘 수 있는 노포와 일상 깊숙한 곳에 새겨진 오래된 만남과 대화들. 그는 가끔씩 꺼내어보는 기억과 그리움 속에서 짙은 위로를 받는 듯 보였다.


한때는 여름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무더위와 불쾌함으로 가득한 여름은 내게 매년 똑같이 흘러가는 숱한 계절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각 계절을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 시작한 언제부터인가, 매 여름은 조금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날씨에 대한 불평 사이사이로 작은 추억과 시간들에 마음을 내어주다 보니 서로 다른 무게의 각 여름은 단단하고 무성한 모양을 띠기 시작했다.


삶은 어쩌면 계절만큼이나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형체도 흔적도 없고, 현재는 끊임없이 사라질 뿐이다. 흘러가는 삶의 공허함을 견뎌낼 방법으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라진 것을 놓아 버리지 않고 최대한 회자하며 살고 싶다. … 계속 이야기하는 한 어떠한 거리도 공간도 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 p.188-189)


그가 열심히 기록을 남기고, 유영하는 감정을 붙잡고, 지나온 공간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때때로 예전 추억에 마음을 기대는 것은 삶의 빈 공간들을 채우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삶이라면, 사라지지 않도록 지나온 것들에 무게를 달면 되는 것이기에.




What's your ONF?


Q. 에디터, 편지 가게 스태프의 시간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으신데요. 프리랜서로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세요. 또, 프리랜서로서의 일상은 어떠신가요?


주로 에디터 때 배우고 쌓아왔던 경험을 활용한 일들을 많이 해요. 여러 가지 콘텐츠를 만들고, 검수하고, 누군가를 섭외하는 그런 일들이요.

프리랜서로서의 삶은 정말 만족스러워요. 내 하루를 내가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는 데서 엄청난 안정감을 느끼거든요. 물론 불안한 때도 있지만, 회사에서 일하며 받게 될지도 모를 다양한 요인의 스트레스가 줄었다는 게 저에게는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대학생 때도 학교에 가던 중에 날씨가 너무 좋으면 무작정 내려서 공원에서 쉬곤 했거든요. 정말 미친 거죠. (웃음) 통제된 삶이 주는 갑갑함보다는 제 의지대로 일상을 확보하는 데서 더 큰 행복을 얻는 것 같아요.



Q. 새로운 맛집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좋아하는 노포의 공간이 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을 찾기도 하시는데, 일과 삶에서는 어떠세요? 도전과 익숙함 중 어느 것을 추구하시나요?

 

익숙함보다는 확실히 도전을 추구해요. 그렇다고 정말 과감한 도전을 하는 건 아니에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의 대단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주로 소소한 도전들이죠. 물론 일정한 안정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엄청난 도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요.

별생각이 없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친구와 더 늦기 전에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나눴어요. 떠난 후엔 어떡할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가면 가는 거지, 재미있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뒤의 일들을 깊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부딪히는 편이라 가끔은 제 삶이 그냥 게임 같아요.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환경과 상황이 너무나 달라지니까요.



- 책에도 비슷하게 쓰셨죠. A부터 Z까지 스물네 가지나 되는 선택지 안에서,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으시다고요.

 

일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제가 행복할 수 있는 경로의 스펙트럼을 넓히려 해요. ‘나 이거 할 때 너무 행복해. 이거 없으면 죽을지 몰라’ 싶을 정도로 무엇 하나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지만, 그러면 정말 그게 사라졌을 때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 텅 비어버릴 수 있거든요. 나이가 들수록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하나씩 늘려 가고 싶어요. 그렇게 여러 갈래로 나눠 놓은 길 안에서 다양하게 좋아하고 자주 행복해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기수가 좋아하는 것들



Q. 기수 님이 쓰신 책 속 저자 소개란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어요. ‘삶의 모티프는 언제나 사랑’, 기수님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 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냥 사랑을 떠올리면 대체할 수 없는 행복감이 느껴지고, 그 시선으로 보는 삶이 너무나 특별해 보여요. 제가 사랑이란 감정을 각별히 생각하게 된 데에는 어릴 적 받아온 사랑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 누나가 셋 있는데요. 첫째, 둘째 누나는 어머니 쪽, 셋째 누나는 아버지 쪽 가족이에요.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건 저뿐이다 보니 어머니께서 저에 대한 애정 표현을 크게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밤이 되면 잠이 든 제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고 가셨죠. 어찌 보면 사랑을 직접 찾았어야 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습관이 사랑을 관찰하고 발견하려 하는 지금의 모습으로 남은 것 같아요.


저는 사랑이 감탄과 이해의 반복이라고 느껴요. 사랑으로 바라보면 온통 감탄할 것투성이거든요. 집에서 키우는 식물이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 친구의 사소한 변화, 이런 것들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관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놓치기 쉬운 것이에요. 똑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그래서 같은 곳을 돌아다닐 때도 찬찬히 지켜보고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죠. 어느 날엔 더욱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고요.



- 사람이 살다 보면 마냥 애정의 시선으로만 보기엔 마음이 온전치 않은 상황도 찾아오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사랑의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세요?

 

맞아요. 사랑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에요. 일이 너무 힘든 순간도 있고, 누군가가 나를 지치게 하는 날도 있고, 하물며 바쁠 때 지하철 하나 놓치면 마음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지잖아요. 그럴 때는 ‘그럴 수 있지’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 노력해요. 그러면 턱 끝까지 차올랐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고, 다시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요.



이옥섭 영화감독이 한 예능 프로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 버려요.’


그녀의 영화에는 악인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과 자신의 미운 점을 미워만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각각이 지닌 숨겨진 면들을 면밀히 보려 한댔다. 미운 사람마저도 귀엽게, 사랑스럽게 보려는 노력은 그녀의 영화와 인생을 증오와 불편 대신 달큰한 애정과 연민으로 가득 채웠다.


영어에는 보는 행위를 지칭하는 세 단어가 있다. 그중 ‘see’는 의도하지 않은 채 우리의 시야에 놓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look’은 의도를 싣고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며, ‘watch’는 마침내 지속적으로, 주의 깊게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무릇 보는 행위는 얼마만큼의 마음을 쏟는지에 따라 그 농도가 현저히 달라진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것을 면면이 헤아리는 시도에서 비롯될지도 모르겠다. 불투명하고 평면적으로 보이는 대상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면 아주 작더라도 애정을 나누어 줄 틈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발견하게 된 좋은 점과 미운 점이 한데 어우러져 입체적인 굴곡을 형성한다. 보드랍고 자유로운 그 곡선들은 뾰족하게 날 서 있던 우리의 시선과 마음마저 주물러준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노력한다는 그의 말은 평평한 시야와 모난 편견으로 삶을 버석하게 채우지 않으려는 그의 다짐으로 다가왔다.




What's your OFF?


Q. 여행을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남들과는 사뭇 다른 기수 님만의 여행 방식도 있으신가요?

 

주로 여행을 길게 다녀오려는 편이에요.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그렇게 다녀오면 여행지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느껴요. 일주일 여행이면 맛집도 가야 하고 유명 관광지도 둘러보느라 그 자체로 온전히 누리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기간이 늘어나면 정말 아무 데나 가도 상관없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죠. 그 여유를 토대로 넉넉히 걷고, 도시에 대한 애정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어요.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정말 내 삶의 조각 하나를 떼어놓는 듯한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정이 들어요. 노포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결의 마음인데요. 제가 사랑을 주는 공간이 많아질수록 외롭지 않게 늙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애정하는 도시가 세계 여기저기에 있다고 생각하면 부쩍 든든할 것 같거든요.


치앙마이에서


- 지금까지 다녀온 모든 장소가 애틋하시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깊이 사랑에 빠졌던 여행지는 어디였을지 궁금하네요.

 

포르투갈의 포르투라는 도시가 정말 좋았어요. 음식도 맛있고, 좋은 와인도 값싸게 맛볼 수 있고요. 사람들도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 친절해요. 특히 모루 공원이라는 곳에서 거의 매일 노을을 봤었는데요. 그때의 광경은 정말 잊을 수가 없을 듯 해요.


포르투
포르투의 모루공원


Q. 캠코더로 일상과 여행을 잔뜩 남겨 놓을 정도로 영상 찍기를 좋아하신다고요. 캠코더를 통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상과 풍경은 무엇이 다른가요?

 

어찌 보면 사랑의 시선과 같은 맥락일 텐데요. 캠코더를 통해 조금 더 천천히, 깊게 관찰할 수 있어요. 또 다른 눈이랄까요. 일전에 사진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께서 제게 또 다른 눈이 있는 것 같다며 칭찬해 주셨는데, 그 말이 참 좋았어요. 꼭 마법 같잖아요.


캠코더로 확대해서 찍으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해요. 봄이 아직 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영상으로 담고 보니 나무 위에 꽃이 피어있고, 벌이 돌아다니고요. 그렇게 새로운 걸 볼 수 있죠. 가장 좋은 건 기록으로 남는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SNS는 남들에게 행복을 과시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제게 기록은 오직 저만을 위한 행복 전시에요. 전시된 지난날의 행복들을 보면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동시에 또 다른 행복이 밀려와요.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영원한 건 없지만 영원할 순간은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 남겨지는 순간 그 장면은 정말 영원히 기억될 것 같아요.



캠코더로 담은 장면들



Q. 기수 님의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해주는 사람들엔 누가 있나요?

 

친구들을 정말 좋아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 먹고 친구 너무 좋아하면 안 된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떠나갈 사람들이라고들 하는데요. 하하. 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아요. 나중에 떠날 것을 염려해서 지금의 좋은 시간을 놓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거잖아요. 제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10년도 넘은 친구들이에요. 깊은 시간을 보내온 만큼, 서로가 전해주는 응원과 지지가 굉장히 깊어요. 두터운 감정을 진실되게 주고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이죠. 가족과 부모님도 마찬가지예요.


나의 영향력을 전 세계로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나를 둘러싼 좁은 반경의 세상에서 나의 주변 사람들과 짙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 친구, 동료... 어쩌면 이 세계가 저의 전부거든요. 그 자체로 나를 충분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이기에, 제가 갖고 있는 이 세계를 정말 소중히 지켜나가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Q. 앞으로 삶을 대할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길 원하시나요?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제 모습이 어렸을 때와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행복을 느끼는 방법의 가짓수가 조금 더 다양해졌을 뿐이죠. 누군가는 철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한결같이 재미있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어쩌면 이렇게 꾸준한 마음으로 30대를 살아가는 것 또한 괜찮은 방법일 수 있겠다 싶어요. 또 그렇게 변함없는 저의 모습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좋을 것 같고요. 앞으로도 그냥 재미있게 살아보려고요. 그래서 운동도 하고, 건강한 음식도 챙겨 먹고, 친구들과도 열심히 만나는 거죠. 더 열심히 재밌으려고.





<Editor's Note>

우리의 존재를 증명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사 모은 물건, 그 물건들로 가득한 나의 방, 내가 걸어온 길. 그것들이 나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기엔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살며 사랑을 나누어 준 모든 것들이 우리의 진짜 마음과 영혼을 싣고 있지는 않을까. 부모가 한 시절을 바쳐 품어낸 사랑은 그의 아이들의 세상에 온전히 담겨있다. 나의 깊은 곳에 자리 앉은 진심과 감정들은 나도 헤아리지 못한 새 빠져나가 내가 사랑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새겨진다.


내가 사랑한 것들에 나의 시선이 담겨있고, 그 시선 속에는 나의 숱한 시간과 경험, 감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 결국 나의 세계란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이다.


“살아간다는 건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아남았다는 건 사랑이 흐르고 있다는 말과 같다.” <한참이 지나도 유효한 사랑> p. 150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은 그만의 이유와 시절을 지니고 있다. 그의 사랑이 이토록 다채로울 수 있는 것은 그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순간들에 애써 눈길을 돌리고 곁을 내어주었기 때문일 테다. 앞으로 행복의 가짓수를 더 확실하게 늘려가겠다는 말은 곧, 더 열렬히 사랑하겠다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 그렇게 그의 삶은 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친 억만장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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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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