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얼른 수속하러 뛰어갔다.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공항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어떻게 미팅할지 고민하다 보니 잠을 거의 못 잤고,
공항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다소 지쳐 보였다.
하지만 피곤함보다 결과를 꼭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컸다.
도착 게이트 밖에서 나와 연락하던 업체 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처음 만나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라 웃음이 나왔다.
차를 타고 업체 사무실에 도착했고,
곧바로 사장실로 안내되었다.
사장을 포함하여 몇명의 담당자가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열고 수많은 고민 끝에 만든 제품 도면을 꺼내놓는 순간,
입사 면접을 보러 온 취업 준비생 때의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주로 설명할 대상은 디자이너이자 테크니컬 담당자였는데
그는 도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서로 오갔지만 결론적으로는 가능하다고 했다.
당시는 5월이었고,
이 EVA 가방은 여름이 절정일 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이템이었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8월에나 생산이 완료된다고 했다.
여름의 끝자락.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첫 제품인데
출발선부터 뒤늦게 뛰어드는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야 했다.
샘플 제작까지는 한 달은 걸린다고 했고,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매일같이 그들이 연락을 기다렸다. 조금만 빨리, 조금만 더 빨리.
그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잠들기 전까지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3주 뒤, 샘플이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일주일 후, 택배 상자를 열어 본 순간
괜찮다!
컬러 없는 흰색 3D 프린트 플라스틱 샘플이었지만,
형태만큼은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에 가까웠다.
크기도 훨씬 커졌고, 용량도 넉넉해졌다.
고객들이 수없이 요구했던 “더 큰 가방”,
그 니즈를 정확히 반영한 형태였다.
각도, 길이, 위치 등에 대해 정밀한 단위로 모든 부분에 대해 확인했고
업체에 요청할 수정 사항에 대해 메모해 두었다.
그중 한 가지 문제는 손잡이가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는데,
파우치를 빼려면 손잡이가 자연스럽게 젖혀져야 하는데
샘플 손잡이는 넘어가지 않고 가방 끝에서 걸렸다.
샘플이 소재가 말랑말랑한 EVA가 아닌 플라스틱이라 그런가 싶었다.
약 1시간 동안 수정사항을 파악하고
바로 그들과 영상통화로 미팅을 진행했다.
메모해 준 수정사항을 모두 이야기했고
그 부분을 반영해서 도면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도면은 다음날 바로 보내왔는데
손잡이 문제로 가방 크기를 1cm 줄이고,
손잡이 길이를 1cm 늘려야 합니다.
알겠으니 얼른 샘플을 다시 만들어 보내라고 했고,
샘플은 2주 뒤에 도착했다.
새로 온 샘플을 꺼내자마자 기존의 샘플과 비교해보았다.
단 1cm.
그 1cm의 차이가 디자인의 ‘형태’를 바꾸고,
심지어 수납 용량마저도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땐 큰 차이를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이 제품을 처음부터 기획했던 나는 그 차이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한참을 샘플을 붙잡고 고민했다.
고객들의 피드백이 “작아요”,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어요”였다.
겨우 1cm였지만 그 1cm의 차이가
마치 고객 니즈에 만족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가능한 한 크게 만들고 싶었다.
샘플의 크기를 보고 빨리 결정을 내려 몰드 제작에 들어가야 했다.
문제는 EVA 소재 특성상
금형(몰드)을 만들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수천만 원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이었다.
결국 나는 결정을 내렸다.
리스크를 줄이기로.
업체에서 권한 ‘안전한 크기’로 진행하기로.
그리고 금형 제작이 시작되었다.
약 한 달의 기다림.
그 시간은 유난히 길고 무거웠다.
이 결정이 맞을지,
혹시 또 다른 변수가 생기진 않을지,
정말 수백 번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에서 연락이 왔다.
샘플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샘플을 받지 않고
내가 직접 가서 샘플을 보고 수정 사항이 있다면
바로 업체에 요청하고자
또다시 비행기 표를 끊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VA로 제작된 샘플은 괜찮을 줄 알았다.
큰 문제없이 바로 생산에 들어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EVA로 나온 실제 샘플은 더 많은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8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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