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 컬러를 맞춘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팬톤 컬러를 아무리 정교하게 골라도
EVA 소재 위에 올려지는 순간 전혀 다른 컬러로 변했다.
거기다 사진으로 그 색이 정확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중국에 상주하며 색이 나올 때마다 직접 확인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미지로만 판단하기엔 위험이 너무 컸다.
중국에서 직접 본 팬톤 컬러로 요청한 샘플이 제작되었지만
영상을 아무리 확대해도, 내가 원하는 ‘그 색’은 아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중국 공장 전시장에서 무심코 찍어둔 사진이 문득 떠올랐다.
그 속엔 우리 제품과 비슷한 질감, 비슷한 톤, 비슷한 느낌의 EVA 제품이 있었는데,
당시엔 ‘예쁘다’ 싶어 찍어둔 사진이었는데, 이 프로젝트의 운명을 결정할 실마리가 될지 몰랐다.
사진첩을 뒤적였고, 사진 속 컬러의 팬톤 정보를 확인해 그들에게 다시 요청했다.
이 컬러 그대로 다시 샘플을 뽑아주세요.
처음 하려고 했던 색과는 아주 조금 달랐지만,
현실과 감각 사이에서 만날 수 있는 ‘최선의 지점’이었다.
색은 감정과도 같아서, 너무 완벽만을 고집하다 보면
영영 손에 쥐지 못한 채 흘려보내게 될 때가 있다.
며칠 뒤, 새로운 샘플이 영상으로 왔다.
빛 아래에서, 그림자 아래에서, 각도를 돌리며 보여주던 그 컬러는
드디어 ‘내가 찾던 그 색’에 가까웠다.
바로 샘플을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샘플 박스를 뜯는 손이 떨렸다.
네 달 가까이 오르락내리락했던 감정이 그 순간 모두 밀려왔다.
샘플을 꺼내 빛 아래에 비춰보자,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컬러 부분은 그렇게 진행하기로 했지만
아직 미비한 부분이 있어 좀 더 보완하여
3차 샘플 제작 요청했다.
이 샘플이 마지막 컨펌샘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중국에서 첫 번째 샘플이 제작되는 동안
한국에서 마냥 기다리고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그 시간 동안이 가장 바쁘고 숨 가쁘게 움직였던 때였다.
1. 방수 지퍼 장착
EVA 소재는 기본적으로 물에 강하지만,
지퍼가 일반 지퍼라면 의미가 없었다.
방수성을 살리고 싶어 방수지퍼를 제안했지만
업체는 ‘원가가 너무 오른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더 나은 제품을 위해 밀어붙였다.
이 정도 업그레이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2. 더 커진 파우치에 손목 스트링 장착
가방 크기가 커지면서 여자 손으로 들기에는 꽤나 컸다.
좀 더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걸 수 있는 공간인 지퍼헤드의 구멍이 너무 작았고,
그 안에 들어갈 스트링은 너무 얇거나, 너무 불편하거나, 너무 약했다.
또한 스트링은 물에도 강해야 했다.
수십 가지 샘플을 사서 모두 끼워보고 흔들어보고 당겨봤다.
하나하나 다 걸어보고, 물에 적셔보고, 힘을 줘 당겨봤다.
결국 딱 하나, 우리가 찾던 스트링을 발견했다.
딱 맞는 크기, 딱 맞는 탄력, 딱 맞는 소재.
그걸 찾는 데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는지.
3.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박스 디자인
나는 디자인 툴을 다룰 줄 몰랐다.
브랜드라면, 패키지는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대충 만들 수는 없었다.
쇼핑몰을 일부러 찾아가 매장에 들어가 제품 박스를 살펴봤다.
재질, 사이즈, 컬러 인쇄, 윈도 위치, 제품이 흔들리지 않는 내부 구조까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기록해 두었다.
박스 디자인을 만들며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또 보여줬다.
능숙하지 않은 실력으로,
몇 날 며칠을 붙잡고 겨우 큰 틀을 완성했다.
한국의 박스 업체에 도면을 들고 찾아갔을 때
최소 주문 수량과 단가가 너무 비싸 또 한 번 좌절했다.
결국 중국의 협력업체를 통해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4. 커스터마이징을 위한 구멍
교복 입은 학생들의 가방을 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꼭 키링 하나씩은 달려있다.
심지어 가방에 10개가 넘는 키링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남학생도 보았다.
크록스 신발은 어떤가.
그냥 크록스 신발만 신는 이는 보기 힘들 정도로
신발에 지비츠 악세사리를 꽂고 다닌다.
크록스 신발에 지비츠가 없으면 어색할 정도다.
사람들은 ‘나만의 것’을 좋아한다.
내 이름이 새겨진 것 혹은
남들과 차별화된 나의 취향이 담긴 것이 좋아한다.
제품을 업그레이드하기 전,
우리는 이런 고객의 니즈를 반영하여
제품에 걸 수 있는 실리콘 혹은 플라스틱 류의
키링을 함께 판매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손잡이에 하나만 걸 수 있다는 건 한계였다.
그래서 EVA를 직접 뚫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수제 공방용 펀칭기를 사이즈 별로 사서 테스트했는데
망치로 몇 번을 두드려야 겨우 하나가 뚫렸다.
여자가 하기엔 너무도 힘들었다.
남자가 해도 망치로 해야 할 정도였는데
책상에 구멍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구멍을 뚫는 걸
고객에게 판매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래 업체에서 새로 개발한 펀칭기가 있는 걸 알게 됐다.
구멍 뚫기가 힘들지도 않았고, 책상에 구멍이 나지 않도록 패드까지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구멍이 크록스 지비츠와 같은 규격이라 호환도 완벽했다.
정말 딱 ‘우리가 찾던 그것’이었다.
5. 악세사리 라인업
사실 우리가 악세사리까지 판매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크록스의 지비츠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발에 꽂고 있던 걸 다시 가방에 꽂는다?
아마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비츠는 예쁘지만 비쌌다.
고객이 부담 없이 여러 개 구매할 수 있는
실용 가격대의 라인업을 만들고 싶었다.
샘플을 왕창 주문했다.
책상 가득 늘어놓고, 우리 제품 색상과 조합하며 하나씩 골라냈다.
개당 소비자 가격은 1,000원대로 잡았다.
이 정도면 고객분들이 한 개 사는 가격으로
여러 개를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채
3차 샘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3차 샘플이 나왔습니다. 한국으로 보내드릴게요.
이번 샘플이, 정말 모든 고민의 끝이길,
생산에 들어갈 컨펌샘플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 시작될 또 다른 여정의 시작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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