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성범죄 피해자에게 하고픈 말

by 아이린

솔직이자기가 겪은 성적 학대에 관해 제대로 상담을 받거나 치료받는 사례는 여전히 많지 않다. 성범죄가 공식 통계로 드러나지 않는 암수범죄(暗數犯罪)의 영역에 머무는 것은 매우 복합적이고 오랜 기간 형성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다. 특히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피해 사실을 숨기도록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주요한 원인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오래전 함께 비디오 플레이어로 영화를 보던 친구에게 , 가족이 어떻게 저런 범죄를 저지르냐고 흥분해서 말한 적이 있다. 아무 말 없이 영화를 보던 친구는 생각보다 많아 이렇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내가 더 흥분했다. 친구는 신고하지 않고 아니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르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컸으니 말이야. 이렇게 냉소적으로 대꾸하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친구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내 어설픈 대처로 그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연락이 끊긴 지 아주 오래되었다.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 아이의 상처에 대한 내 미숙한 대처를 심리학 공부를 한 후에야 제대로 깨달았지 뭔가.


국내에서 성적 학대(성폭력)에 대한 통계는 여러 기관에서 발표하고 있다. 그중 여성가족부의 여성폭력 실태조사와 보건복지부의 아동학대 연차보고서 등에서 관련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


1. 여성폭력 실태조사 (여성가족부)

'여성폭력 실태조사'는 성인 여성의 성적 폭력 피해 경험을 포함하여 다양한 폭력 유형을 조사하고 있다.

2024년 여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여성 응답자 중 평생 동안 성적 폭력 피해를 한 번 이상 경험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 여성폭력 피해 경험률(신체적, 성적, 정서적, 경제적 폭력, 통제, 스토킹 포함)의 일부를 차지한다. 지난 1년간 성적 폭력 피해 경험률은 다른 폭력 유형 중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예: 4.0%). 피해 발생 연령을 보면 가장 심각했던 성적 폭력 피해의 경우, 10~30대에서 80% 이상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2. 아동학대 통계 (보건복지부)

보건복지부에서 매년 발간하는 아동학대 연차보고서에는 아동학대 유형별 현황이 포함되며, 여기에 성학대 통계가 별도로 집계된다. 2023년 아동학대 판단 건수 중 성학대가 차지하는 건수와 비율이 매년 보고된단다. (예: 2021년 성학대 판단 건수 655건)


성범죄가 여전히 암수범죄가 되어버리는 이유로는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순결과 정절을 강하게 요구하는 문화적 배경이 있는 점도 작용한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더러운 것이 묻었을 뿐이니 깨끗이 씻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본 적 있다. 그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며 씻어버리면 없던 일이 된다고 하는지... 씻으면 별일 아니다가 답이 될까? 그게 또 하나의 낙인을 찍는 발언이 아닌지.


요즘은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예전 지방도시에서 벌어진 집단강간 사건이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다시 수면에 떠 올랐던 적이 있다. 그 사건이 벌어진 도시에 취재를 간 이에게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는 지역사람을 보고 비난을 받거나 사생활이 침해될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할수 있었다. 이러한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고 자체를 주저하게 되겠구나 싶었다. 특히 가족 구성원이나 친인척 간에 발생한 성범죄의 경우,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가족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로 간주되어 침묵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어떨까?


또 성범죄가 성욕 해소가 아닌 권력과 지배욕의 표출이라는 관점과 연관이 깊다.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와 성차별적 성역할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지위를 낮추고, 남성이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용인하거나 당연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여성이 이에 대해 저항을 하는 경우, 죽음에 이를 정도 치명적인 폭력을 당하거나 살해되는 일도 생겼다.


우조교 사건 그리고 삼일교회 전 모 목사 사건 같은 위계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피해자가 신고할 경우 보복이나 불이익(해고, 학업 중단 등)을 당할 것을 우려해 피해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피해자는 더욱 고립된다. 수습되기 전 삼일교회 사건의 피해자는 교회 내에서 사악한 뱀과 같은 존재로 취급당했다고 들었다.



과거 수사기관과 사법 시스템의 미흡한 대응도 암수범죄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과거에는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거나,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캐물어 피해자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게 과거라고 더 이상 그런 일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성범죄는 은밀하게 발생하는 특성상 명확한 물적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과거에는 병원으로 가서 증거 채취를 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는 가해자를 처벌하기 힘들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로 인해 피해자들은 고소해 봤자 소용없다는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피해자들은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보다 스스로 죄책감과 좌절감을 감춘 채 침묵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는 성범죄가 공식 통계 밖의 암수범죄로 남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었다. 최근에는 사회적 인식 개선과 법 제도의 변화로 피해자 보호가 강화되고 있다지만, 이러한 전통적 요인들이 남긴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육체적으로 입은 상처를 치료해서 회복하려면 가장 중요한 단계를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자도 있다(나는 괜찮지 않다:배르벨 바르테츠키)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런 상황에 놓은 것은 아님을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자기 몸에 대한 그리고 마음에 대한 주도권을 찾을 수 있단다. 딱히 성범죄 피해의 경우만이 아니다. 자녀를 잃은 어느 어머니는 아이의 안전을 챙기는 일을 더 우선시하지 못한- 그녀는 직장에 다녀야 했다- 일을 자책했었다.


그냥 나쁜 일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누구 탓도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의 탓이나 내 탓으로 돌려서는 회복의 길은 요원하다. 중요한 것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그 일이 나의 삶을 흔들지 못하게 마음을 다잡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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