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그리고 그리움
대한민국의 보통 여인네의 삶을 살던 할머니는 1922년 생이셨다. 그 당시에 여자들의 표준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농사짓는 집의 맏이로 다섯 동생을 업어 키우고 집안일을 도우며 그렇게 사셨단다. 할머니는 초등학교라도 다니고 싶었다고 훗날 말씀하셨었다. 동생들 중 여자 동생들은 할머니처럼 학교 문턱도 못 밟았지만 남동생 셋은 초등학교랑 중학굔가 아무튼 거기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는 얼굴이 좀 잘생겼다는 것 외엔 생활능력도 변변찮은 할아버지에게 중매로 시집을 와 지독하게 고생을 하셨다. 할머니는 무서운 시어머니에게 기죽으면서 남편이 가져다주는 쥐꼬리만 한 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단다. 남편은 일 년이면 반은 몸 져 눕는 사람이었단다. 할머니는 정말 몸이 약한 사람이었으면 화 안 났을 거란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몸을 무진장 아껴 조금만 아프면 자리보전 하던 사람이었다. 나도 목격한 거니 젊은 날에는 더 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일을 나간다는 상식이 없던 우리 할아버지 배관 기술자에 목공도 하셔서 본인이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집안 사정은 나았을 거라나.. 할머니는 훗날, 조금이라도 몸이 아프면 일을 쉬는 남편을 죽이고 싶던 순간이 있었다고 하셨다 쌀을 살 돈이 떨어지면 빌리러 다녀야 했고,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갚느라 돈을 모은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나,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가 마련한 집 한 칸이라도 없었으면, 가족 모두는 길에 나앉아 죽었을 거라나...
할머니는 점점 강해지셨다.. 6. 25를 거치고는 남대문 시장에서 행상도 하셨단다. 울 아버지가 큰 고모를 데리고 오면 사이사이 젖을 먹였다 했다. 큰 고모는 종전 직후 태어났다. 애 낳았다고 누워 있을 형편도 안되어 퉁퉁 분 젖을 동여매고 장사를 나갔다고 그러셨다. 당시 우리 집은 북창동에 살았다. 남대문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 아버지나 삼촌들이 큰고모를 시장에 데리고 와서 젖을 먹였단다. 할머니는 밑천이 얼마 없어 좌판에 앉아서 보잘것없는 물건을 사달라 호객을 하며 얼굴이 뜨거웠단다. 배는 왜 그리 고픈지
아들들이 젖먹이라고 고모를 데리고 나올 때 가지고 온 찬밥 한 덩이라도 먹지 않았으면 쓰러졌을 거라나
아무튼 세월이 지나 우리 집 형편은 나아졌다. 아버지가 고학을 하며 공부를 마쳤고 고모들도 공부 잘하는 큰고모 그냥 그런 작은 고모 다 고등학교는 마쳤다. 대학에 가고 싶어 하던 큰고모는 당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적성에는 맞지 않지만 국립 간호대에 들어갔다. 뭐 거기서 큰 고모부를 만나 나중에 꽃길(?) 걸었지만.. 미인인 큰고모의 얼굴이 혼인에 도움을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흠.... 작은 고모도 그럭저럭 평범하나 착한 남자와 혼인을 했다. 이 모든 변화는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한 후 생긴 일이다. 할머니는 그래서인지 우리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어려워했었다.
두 명의 삼촌들은 일찍 세상을 버렸다. 이 일은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의 가슴에 상흔이 되어 버렸다.
나랑 할머니는 상극이었다. 내 인생에 굴곡을 만든 요인 중 하나는 할머니였다. 당신도 딸이라는 이유로 겪은 서러움을 손녀는 겪지 않게 그리고 딸은 겪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이 없는 분이었다. 고모들은 어땠는지 모르나 집안 형편이 나아진 무렵 일을 하는 아들 며느리 때문에 당신 앞에 던져진 손녀에게, 할머니는 가혹하셨다. 돌 조금 넘어서 동생이 생겼고, 어린 내 눈에도 할머니가 남동생을 더 많이 안아주고 챙기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나웠다. 늘 욕구불만에 시달렸다. 양보라는 건 내 사전에 없는 듯 동생 손에 들어간 것 하나라도 빼앗으려 했고 그래서 어린데도 많이 맞았다.
나는 많은 것을 빼앗겼다. 집안 형편이 허용하지 않았으면 바라지도 않을 일들이었다. 내 부모가 보내준다는 고등학생 때의 해외 연수 그리고 유학 다 빼앗겼다. 아들이 먼저지 어디 계집애를... 울고 반항했지만 뒷목 잡고 쓰러져 단식투쟁하는 할머니를 부모님은 이기지 못했다. 나는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시집살이 심하게 한 며느리가 지독하게 시집살이시키는 시어머니가 된다 했나? 아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할머니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년생 동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게 만드셨다. 동생은 언젠가 내가 누나 인생을 꼬았다고 했다. 알긴 하나 나쁜 놈..
할머니가 투병을 하실 무렵 휴학을 하고 병간호를 했다. 할머니에게 엄청난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병시중 드실 분도 아니었고, 집에서 생산활동 하지 않는 이는 나뿐이었기에 거부하지 못했다. 얄팍하게나마 장녀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휴학을 한 이유는 학교를 간 동안 할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다. 할 머 니의 딸들은 각자의 이유로 와서 들여다보고 갈 뿐이었다. 지금처럼 간병인 제도가 있던 때가 아니기도 했으니 ,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요한 이는 없지만,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기저귀를 갈고 식사를 만들고 약을 먹였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악스레 대들어서 당신을 가출까지 하게 만든 손녀에게 간병을 받으면서도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분이 마지막에 미안하고 고맙다고 하셨다. 내 나이 25세의 일이었다. 솔직히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상처가 큰 탓이,었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앙금이 풀렸다고 할까?
할머니의 간병을 하면서도 나는 내 뼛속 깊이 자리 잡은 맏이 콤플렉스가 진저리 났었다. 그다지 좋은 성격도 아니었는데 내 속 어딘가에 맏이 콤플렉스가 자리 잡았는지 ,.. 팔자에 없을듯한 효손 노릇을 했다. 병간호 경험은 충분히 쌓는 공부를 그때 똑같이 평생 희생자로 살아했다. ㅠㅠ
연민이었을까?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하며 산 삶이 가여웠던 걸까? 이만큼 시간이 지나도 모르겠다. 나 역시 할머니와 닮은 행동을 많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빤히 잘못임을 알면서도 내 것을 넘겨주고 피해를 동생 대신 입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거칠게 내 의견을 내세우지 못한 과거가 속 상하지만 더 이상 그게 나를 휘두르게 말아야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앞만 보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나는 동안 딱 두 번 꿈에 할머니를 만났다. 조카가 태어나기 전, 그리고 올여름 공교롭게 두 번 다 집에 변화가 많이 생겼다. 또다시 꿈에 할머니 볼 일 생길까? 많이 미워하던 사람이 보고 싶어 지는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