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말하는 불효녀였다.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 이유

by 아이린

나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공립 내지 국립 근처도 가지 못했다. 당시로는 드물디 드물게 가톨릭 유치원에 다녔다. 내 나이 또래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일은 글쎄.. 아무튼 동네에서 유일하게 유치원물 먹은 여자다. 흠 그렇게 경제적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닌데 유치원에 보내신 이유는 모르겠다. 보통 돌봐줄 어른 없으면 어디 보내긴 하는데 나에겐 별 도움은 안돼도 할머니가 양육자로 계셨으니 말이다. 유치원에 돈 들여 왜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다가 우리는 가톨릭 신자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후에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나신다 그러셨다. 일 년짜리 유치원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할 무렵, 내 소꿉놀이 남자친구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초등학교에 갈 거란다. 이제 얼굴도 희미한 그 애를 내가 무척 좋아했단다. 어머니 말로는 그랬다. 내가 부모님께 그 아이가 가는 학교에 보내달라 그러자 부모님은 당황하셨었다. 유치원이야 그냥 보내도 초등학교 6년은 얘기가 다르니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유치원에 그 남자아이도 다녔었다. 어머니는 기억 안 난다 하지만, 그 아이 가는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우긴 것 같다. 그 이유가 아니면 내가 유치원 보내진 이유가 설명이 안된다. 뭐 내 동생 놈은 그 덕에 내가 유치원 졸업한 다음 해에 지도 유치원 들어갔지만...


내가 보내달라고 떼쓴 학교는 사립학교다. 지금이야 이름 대도 사람들이 잘 모를 거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립 명문으로 불리던 곳이다. 스쿨버스에 교복에 그리고 아이들의 부모는 최소 회사 사장 내지 이사에... 당시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셨고 어머니는 약국을 하셨다. 부유하진 않으나 그냥 평범한 삶은 사는 정도였다. 나는 떼쓰면 꺾기 어려운 아이였다. 고집을 잘 부리지 않지만 한번 발동 걸리면 매를 맞아도 고집하는 것을 얻어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부모님은 나와 협상을 하셨다. 거기는 추첨을 해서 뽑혀야 가는데야. 일단 추첨은 해보자. 떨어지면 그냥 동네 학교 가는 거다 알겠지?


추첨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끄덕거리고 명륜동에 따라갔다. 교실에는 내 또래 애들과 부모가 있었다. 교실 티브이로 추첨 현황이 나왔다. 어머니는 별 생각이 없으셔서인지 내가 붙을 거라 생각 안 해서인지 시간이 지나자 옆에서 졸고 계셨다. 어린 나는 뭐 안다고 긴장하며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방송을 들었다. 거의 마지막에 내 번호가 불렸다. 나는 졸고 있는 어머니를 흔들어 깨운 후 내 번호 나왔다고 그랬다. 그날 기억에 어머니는 한숨을 쉬시더니 , 접수증인가 합격증인가 뭐 그런 종이를 받아 들고 나를 데리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날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는지 다 와서였는지 학교에 갈 때 신으라고 구두를 사주신 기억은 난다. 어머니는 유독 뽑기 운이 좋은 나지만, 이것도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셨단다. 그런데 말이다. 내 소꿉친구 남자아이는 추첨에 떨어졌다. 그 아이랑 같이 학교 다니겠다고 난리를 피운 게 무색하게 말이다. 어머니는 그냥 그 학교 가겠느냐 물으셨다. 추첨된 걸 포기할 만큼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나는 그 학교를 다녔다. 6년 내내 배운 것도 많았지만, 어린 나이에 빈부 격차가 뭔지 실감도 했다. 한 번도 우리 집이 가난한 거라 생각 못하던 나는 , 진짜 부자의 삶을 약간 맛본 것 만으로 주눅이 들었었다. 부모님은 학교에서 하는 모든 것을 다 해주시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하실 수 있는 만큼은 해주신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 겪은 컬처쇼크가 극심했던 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힘들게 했는지 실감했다 해야 하나? 아버지는 나중에 대학교는 국립으로 가서 돈 적게 쓰도록 해야 한다 강조하셨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고 대학원까지 사립을 다니면서 부모님 허리를 휘청이게 만들었지 뭔가. 요즘이야 학생수가 줄어 폐교 운운한다지만, 당시의 공립 초등학교들은 한 반 인원이 6-70명 학급수는 최소 10 학급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학년당 세학급 반아이들은 45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배웠었다. 겨울에는 석유난로가 춥지 않게 만들어주던 학교가 아닌 학교를 다니던 나는 동네 친구들과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 나는 동네 친구들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 친구는 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시 나는 아웃사이더 소위 왕따였기 때문이다. 자가용도 기사도 없는 그리고 외제 학용품도 없고 외제과자도 먹어보지 못한 나는 반 아이들의 세계에 끼어들지 못했다. 그래도 실컷 책을 읽을 수 있는 학교 도서관 그리고 실습시간 견학 등등으로 내 초등학교 시절은 나름 풍성했다. 남자아이 쫓아 들어간 학교가 내게 준 것은 참 많았다.


한 가지 더... 기독교인인 내가 조회 때마다 듣고 따라 해야 하는 삼귀의례 사흥서원은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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