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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삐 Nov 22. 2022

67. '죽을 만큼 힘든데 행복하다'는 말

친구가 시험관 시술을 한다고 카톡이 왔다.

힘들어할 친구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오 마이 갓. 시험관을 어떻게 했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브런치에 적어 놓은 기록을 보고 나서야, 아~ 그때 그랬었지 하고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려 본다.

분명 나는 '힘들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음이 힘들어서 브런치도 시작했었다. 그런데 왜 기억이 안나는 거지?

그때(시험관 시술을 진행할 때)의 힘듦은 입덧의 고통과 만삭의 불편함으로 서서히 잊혔고 출산을 하면서 겪었던 고통(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던)은 시험관 시술을 할 때의 고통을 완전히 잊게 만들어줬다. 육아는 뭐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고통이라고 느꼈던 그것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퇴색된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에 함께 웃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달라지는 아이의 발달 상태를 보면서 손뼉 치느라고 내가 언제 힘들었냐는 듯 살고 있다.

이럴 땐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서 참 다행이다.

언젠가 쌍둥이 육아를 하고 있는 친구의 카톡 프로필에 그런 글이 올라왔다.

'죽을 만큼 힘든데 행복하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이제는 왜 그런 이상한 논리가 성립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힘들긴 힘든데,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몰랐을 진짜 행복이 육아에 있다.




어젯밤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어? 인생을 다시 한번 살고 싶어?"

남편은 대답 대신 내게 되물었다.

"당신은?"

"나? 나는 돌아가고 싶은 때가 없어. 사실되고 싶은 것도 없고."

수능과 공무원. 솔직히 두 번의 시험에 뼈를 갈아 넣은 까닭에 더 이상 아무런 삶의 목표가 없다.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지 않고, 내가 그토록 책을 싫어하게 된 이유도 고통스러웠던 그 시험 때문이다.

데 단지 되고(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지금 삶이 좋아서 남편과 아이를 두고 나 혼자 돌아간다는 건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만 해도, 행복은 돈, 성공(승진)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생긴 이후에 행복이라는 첫 조건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인생이라는 책에 갈피를 꽂고 다시 펼쳐보고 싶은 한 페이지가 있다면 그건 지금일 거다.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우린 15년 지기고,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내가 임신을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카톡과 통화만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아이를 재워 놓고 옷 방에 들어가 소곤소곤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어느 순간 친구가 말한다.

"야, 너 지금 그거네. 산후 우울감!"

내가 산후 우울감이 왔다고? 왜 내가? 난 그저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외딴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싫어서 사무치게 사람이 그립다는 말을 한 것뿐인데 그것도 산후 우울이야?

친구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사람을 좀 만나라고 한다.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딨냐고 말하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만날 사람이 없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안 한지는 꽤 오래되었고 대학교 친구들은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고(다 남편을 따라) 내 출산이 늦은 탓에 아이들 연령 차이가 크다. 코로나 때문에 조리원 동기도 못 만들었다. 

그리고 만날 사람이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선뜻 연락하기 불편한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다.

- 미혼인 친구.

- 기혼인데 아이가 없는 친구.

- 아이를 낳고 전업맘이 된 친구.

언제부턴가 나랑 상황이 안 맞는 친구들이랑은 공감대 형성이 잘되지 않는다. 어쩌다 연락을 하게 되어도 서로 속 이야기는 안 하고 겉 이야기만 빙빙 둘러하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라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면서 연락을 마무리한다. 

내 대인관계 능력이 부족해진 걸까. 아니면 애쓰고 싶지 않은 걸까.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힘들지만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몇 배는 힘든 것 같다.

인간관계가 결혼으로 달라지는 건 알았는데 육아로 사람이 걸러지는 건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국민학교 1학년쯤엔가 엄마에게 "왜 엄마는 친구를 안 만나? 친구가 없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내 친구의 엄마 모임에 가거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만 만났다. 그게 8살짜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연고도 없는 곳에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스물세 살에 나를 낳은 엄마가 고된 시집살이를 하면서 어떻게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그 질문이 '미안한 물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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