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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삐 Apr 13. 2023

77화. 이상한 오픈런

일요일 소아과에 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부터 아들의 기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숨 쉴 때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호흡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기침을 시작하면 그칠 줄 몰랐다. 밤새 한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울었다.

엄마에게 받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돌부터 아기들이 많이 아프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확실히 잔병치레가 잦아졌다. 어린이집 다닌 후로 더 자주 아프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무심결에 아이의 몸을 더듬었는데 불덩이 었다. 열을 재보니 39.5도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일요일에는 소아과 대기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어서 일요일 진료는 피하고 싶었는데.. 처음 보는 체온계의 숫자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운동복을 주섬주섬 꺼내어 입었다.



택시를 불러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26분. 이만하면 선방이지,라는 이상한 자신감을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원무과 앞에 도착했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복도에는 이미 50명가량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중에서 몇 명은 뭘 알고 왔는지(?) 야외 접이식 의자까지 준비해서 앉아있었다.

아이는 한 명도 없고 죄다 어른, 그것도 대부분이 남자였고 중간중간 할머니도 있었다.

나처럼 보호자 한 명이 병원에 먼저 가서 번호표를 뽑고 접수를 한 뒤, 다른 보호자가 진료 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러 오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진료가 시작되려면 1시간 35분이나 남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해있는데 곧 밀물이 들어오듯 사람들이 들어왔다. 좁은 복도에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나는 사방이 키 큰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앞을 볼 수 없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가늠이 안 되었다.

만약 여기에서 불이라도 난다면 (단신인) 내가 제일 먼저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슬펐다.

아이와 같이 온 엄마는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느라 고생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도 일요일 소아과는 처음이겠지. 알았다면 유모차에 태워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곧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는 병원 관계자에게 이 아수라장을 통제해 달라고, 이러다 사고 나겠다고 소리쳤는데 곧 병원 관계자의 거절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찰칵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북새통의 현장을 찍어서 집에 있는 배우자에게 보내거나, sns에 올리거나, 아님 기념으로 간직하려는 건가.


이 줄의 선두 대열에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몇 시에 온 걸까.

백화점 오픈런이 이런 풍경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차 너무나 지루한 기다림에 멀미가 나기 시작했고,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에 그득그득하여 갈등을 하는 동안 8시 반이 되었다. 병원 문이 열렸다. 접수 기계에서 접수증을 뽑았다. 

작은 종이에 '50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도 50번이면 오전에 진료를 볼 수 있겠다 싶어서 안도감에 멍 때리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었다.


"여보, ooo 선생님은 oo명이 예약했고, oo 선생님은 oo명이 예약했어. 누구 해야 돼?"


그제서야 번뜩 정신을 차리고 전광판이 올려다보았다. 인기 많은 선생님의 대기자 수는 30명이 넘어가고 가장 인기 없는 선생님의 대기자 수는 고작 2명이었다. 두 번째로 대기자 수가 많은 선생님으로 진료 접수를 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우리 열세 번째야. 천천히 준비해서 와."


'오픈런' 덕분에 10시쯤 진료를 끝났다. 우주는 폐렴 초기 증상이었다. 수납을 하고 나오는 길에 접수창구를 보니, 인기 많은 선생님 둘은 오후 시간까지 진료가 마감되어 있었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 올해 소아과 전공의가 미달되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올해 상반기 소아과 전공의 모집정원이 207명인데 겨우 33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전국 소아과 600여 곳이 문을 닫았다는 보도도 봤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심각한 것인지는 몰랐다.

'소아과 오픈런'을 하고 나니 비로소 출생률의 감소, 소아과 전공의의 미달, 소아과의 폐원 등으로 내 아이가 소중한 진료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워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지금은 내가 집에 있지만 나중에 복직하고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하지? 오늘처럼 새벽부터 줄 서야 되는 건가? 아이가 아프니까 마음이 정말 아파.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건 말이 안 되지만. 여하튼 앞으로도 많이 아플 텐데 제대로 케어를 못할까 봐 겁이 나."


남편은 조용히 물었다.


"신이 인간에게 자식을 준 이유는 뭘까?"


느닷없는 질문이지만, 나는 남편이 가끔 그런 류의 질문을 내게 던지는 걸 좋아한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문치적대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기쁨을 느껴보라고?"


솔직히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육아를 하면서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의 비율이 기쁘다고 느끼는 순간의 비율을 크게 압도했기에.


남편은 말했다.


"네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에 있다는 걸 느껴봐라. 그 이유래"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엄치를 치켜들었다.


"남편, 그 대답은 생각도 못했는데, 너무 멋있는 말이다. 철학적이고."


남편은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면서 말했다.


"멋져? 이거 스카이캐슬에 나온 대사 따라 해 본 건데. 자식을 키워보니까 맞는 말 같아. 오늘만 해도 그래. 왜 이렇게 자주 아픈 건지. 갑자기 열나고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잘 몰라. 우리만 그런 건 아닐 거야. 다들 그렇게 살 거야.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고. 앞서 걱정할 필요도 없어. 그냥 아,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세상에 많구나 받아들이면서 살자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자고.


그래도. 소아과 가는 게 덜 힘든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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