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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삼팔house Apr 20. 2020

공장16의 기계B-3 속 부품f-27


이것이 도약일런지, 도피일런지.
어쨌거나 현실을 떠나 또다른 현실을 만나기로 했다.

공장16 지하 1층에는 기계 부품들이 삐걱대지 않도록 기름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하는 AM 9:00 즉전이 되면 각 층의 기계 부품들이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그곳을 방문한다. 나 부품f-27는 대부분의 아침을 부품f-11, d-3과 함께 기름칠로 시작한다.

AM 8:43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번호표가 붉은빛을 내며 산발적으로 진동하자, 부품f-11, d-3과 나는 주문한 기름을 받기 위해 이동했다. 두 개의 플라스틱 용기에는 각각 반투명한 고동색과 캐러멜색 기름이 담겨 있었고, 종이 용기 하나에는 부드러워 보이는 새하얀 거품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반투명한 고동색 기름에 빨대를 꽂고 크게 두 번 빨아들였다. 뻑뻑했던 접합부가 일시적으로 매끄러워진다.

AM 8:49
승강기를 타고 8층에 내린 뒤, 도면과 일치하는 각자의 위치에 끼어들어갔다. 항상 늦는 a-7만 나타나면 기계B-3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펜을 들고 눈에 보이는 아무런 종이에 오늘의 업무를 순서대로 입력했다.

AM 9:00 작업 시작

수화기를 든다. 버튼을 누른다.
(통화 연결음)
A: 네, 여보세요.
f-11: 다음 달 신제품 기사에 필요한 제품 협찬 요청드립니다.
A: 언제까지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f-11: 수요일 오전 11시까지, R스튜디오입니다. 감사합니다.
A: 네, 감사합니다.

나는 본래의 모양을 바꿔 재조립했다. 앉아 있는 이 공간에 꼭 들어맞으려면 그래야 했다. 그리고 공장 시스템이 설정한 대로 움직인다. 몸 여기저기에 나사가 박혔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갈수록 주변부가 부풀어 오르더니 간지러웠다가 따가웠다가, 이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다.
B: (통화 연결음 후) 네, 여보세요.
f-11: 신제품 기사에 제품 협찬 요청드립니다.
B: 언제까지 어디로?
f-11: 수요일 오전 11시까지, R스튜디오. 감사합니다.
B: 네, 감사.

나는 감시 말고 관심을 받고 싶다. 입력된 명령어대로 원활하게 작동하는가-하는 감시에 신물이 난다. 얘는 또 무슨 일들을 벌일 런지-하는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부품 f-27이 아니라 ‘나’이고 싶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른다.
C: (통화 연결음 후) 여보세요.
f-11: 신제품 협찬 요청.
C: 언제 어디?
f-11: 수요일 오전 11시까지, R스튜디오. 감사.
C: 감사.


...


공장의 출구를 나가면 곧장 표지판 없는 비포장 도로에 닿는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어 보련다. 표지판은 필요 없다. 내 안에 내비게이션이 탑재되어 있으니까. 걷기 힘든 울퉁불퉁 흙길도 좋다. 멋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면야.

이것이 도약일런지, 도피일런지.
어쨌거나 현실을 떠나 또다른 현실을 만나기로 했다.

일 그만둘게요.
-네. 대체품을 주문할 테니 도착할 때까지만 계시겠어요?



'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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