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아픈 날엔 시장으로 가자!
휴직을 하고 우울한 날은 계속 이어졌다. 며칠간 집에서만 지낸 탓인지 몸은 축 쳐지고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뱃속의 허허로움은 극에 달했다.
‘이번 생은 미성숙한 인간으로 허우적거리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뭐 기운 낼 만한 일이라도 없을까?’
방구석을 뒹굴며 고민하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재래시장으로 가자!’
새 집으로 이사를 와서 시장의 존재를 잊고 지냈다. 시골 출신이라 그런가. 나는 평소에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대형마트보다 사람 냄새나는 재래시장을 더 좋아한다. 휴대폰으로 집 주변에 있는 시장을 검색해 보았다. 버스를 한 번만 갈아타면 되는 거리에 ‘일산시장’이 있다. 3일과 8일에 5일장이 열린단다.
기다리던 장날이 되어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둘러보니 시장의 규모가 제법 컸다. 지난 설날 다녀왔었던 서울 광장시장과 비교해도 못지않은 크기다.
시장 입구부터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미숫가루며, 구운밤, 갖가지 계절 과일, 다 열거할 수도 없는 먹거리로 거리가 가득하다. 제철을 맞은 햇감자가 반갑다. 닭강정이며 빨간 어묵, 찹쌀 도너츠 등 간식거리가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장 싱싱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골라 야무지게 장을 봤다. 오이 고추 한 소쿠리 2천 원, 럭비공만 한 호박 한 개 천 원, 수미감자 한 소쿠리 2천 원, 떡 3팩 5천 원, 옥수수 2개 천 원, 순식간에 가방이 묵직해졌다. 그리고는 근처 칼국수 집에 가서 3천5백 원짜리, 간이 삼삼하고 국물이 맑은 칼국수를 먹었다.
하루 반짝 열렸다 닫히고 마는 장에 상인들은 어찌 저렇게 많은 물건들을 짊어지고 나왔을까? 결코 누군가 마술을 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쉽게 걸음을 옮기는 오일장에는 누군가의 땀과 노고가, 새벽잠을 설치며 빚어낸 정성이 구석구석 깃들어 있다.
매일 손에 찬물을 묻어야 하는 고달픈 운명을 가진 생선 아저씨도, 파릇파릇 자식같이 키운 식물들을 단돈 2천 원에 기꺼이 내어 주시는 식물 장수 아저씨도, 손님이 없어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곡물 장수 아저씨도, 집에서 키운 듯 소박해 보이는 채소를 골병든 무릎앞에 자식처럼 펼쳐 놓고 손질이라는 정성을 얹어 파는 할머니도 정겹다.
무더운 여름내 뜨거운 불 앞에 서서 일을 해야 했던 탓일까. 볼 빨간 빈대떡 언니도, 뻥이요! 를 외치며 시장 풍경에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더해주는 뻥튀기 아저씨도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에 두고 온 이모 그리고 삼촌 같아 아득하다.
그래, 내가 시장을 좋아하는 건 물건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내뿜는 건강한 에너지 때문이었다. 시장에서 만나는 상인들은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삶을 마주하는 태도다. 그들의 얼굴과 에너지에서는 성실함을 넘어 어떤 경건함마저 묻어난다.
그리고 오늘, 나의 밥상에는 늘 올라오던 스팸이며 온갖 종류의 냉동식품들이 자취를 감췄다. 분이 폴폴 나는 감자밥을 하고 봄의 양분을 듬뿍 먹고 자란 풋고추와 달큰한 된장, 소금을 치지 않은 마른 김을 준비했다. 그리고 국 대신 큼지막한 유리컵에 얼음을 잔뜩 넣은 매실차를 탔다.
뚝딱 밥상을 차려 한 끼를 먹으니 속이 든든하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밥상이라 하겠지만 누군가의 수고가 잔뜩 더해진 이 밥상이 세상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밥을 다 먹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장을 가니까 나도 열심히 사는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된 것 같아서 며칠째 눅눅하던 기분이 펴지더라. 그리고 거기서 사 온 것들로 든든하게 밥 한 끼를 해 먹었더니 보약이라도 지어먹은 것처럼 기운이 났어.”
먹고사는 일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이 그리 바빠 끼니를 대충 때우며, 인생을 대충 때우며 살아온 것일까.
나는 오늘부터 재래시장을 ‘위로 시장’이라 부르기로 했다. 앞으로 마음이 텁텁하고 헛헛해질 때마다 위로 시장으로 달려갈 테다. 거기서 사 온 것들로 밥을 해 먹고 다시 힘을 내 살아갈 테다.
나와 같이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 말을 건넨다.
‘지친 마음을 장바구니에 넣어
어서 위로 시장으로 가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