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Portland), 오리건주
미국 1년 살기를 계획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도시는 포틀랜드였다. 실제로 포틀랜드에 잠시 살다 온 지인을 만나 거주지로서의 포틀랜드는 매력적인지, 생활비 수준은 높은 편인지 등을 꼼꼼하게 물어본 적도 있다.
지인은 포틀랜드의 겨울에서 봄 날씨는 비가 오는 날이 많다고 했고 노숙인 문제가 과거에 비해 심각해졌다고 답했다. 집 렌트비도 많이 올랐으니 차라리 더 저렴한 주에 살면서 아낀 돈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포틀랜드에 사는 것이 이렇게나 별로라고? 좋은 점도 좀 얘기해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포틀랜드는 후드산 등 인근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자연과 도시를 함께 즐길 수 있고 소비세가 없어서 생활 물가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포틀랜드만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문화가 매력적이다. 여기까지 듣자 사실 이미 포틀랜드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차 있던 내 결론은 이랬다. “그러니까 포틀랜드는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는 거죠?”
아쉽게도 포틀랜드 1년 살기라는 야심찬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학교 등 다른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해 조지아주 소도시 에선스에 살면서 대신 포틀랜드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렇다면 포틀랜드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 일단 미국살이 초기 적응을 끝마친 이후였으면 좋겠다. 8월에 미국에 발을 디뎠으니 9, 10, 11월이 제외됐다. 너무 춥거나 덥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인 12, 1, 2월이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비오는 풍경보다는 화창한 날씨를 더 보고 싶다. 비가 자주 내린다는 3월도 삭제. 봄 기운이 피어 올라 햇볕도, 온도도 적당하고 내 생일까지 있는 달 4월로 정했다.
이제 드디어 간다 포틀랜드.
시애틀에서 약 4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포틀랜드 유니온역에 발을 내딛었다. 블로그 사진과 유튜브 영상으로만 보다가 처음 마주한 포틀랜드의 첫 인상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역 앞 벤치에서 나른하게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 그 앞을 지나칠 정도로 느릿 느릿 걸어가는 노숙인, 입고 있던 자켓이 살짝 답답하게 느껴지는 햇살. 그런데 이 모든 모습이 그냥 좋았다. 이상하다. 포틀랜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포틀랜드라는 도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한국에 한창 킨포크가 알려지던 201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여유롭고 자연친화적인 킨포크의 유행으로 소위 ‘힙’하다는 사람들은 다들 포틀랜드를 꿈꿨다.
8평 원룸에서 고장난 보일러와 씨름하며 살던 나에겐 킨포크는 먼 이야기여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솔직히 킨포크가 정확히 뭔지 아직도 감이 잡히진 않는다.) 하지만 포틀랜드를 비춘 한 영상에서 쿠키몬스터 같은 머리를 하고 길을 걷는 사람을 봤다. 도대체 어떤 도시이길래 저렇게 이상한 머리를 하고 다니는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거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사는 것이 익숙한 나에겐 신기한 모습이었다. 그 때부터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쓰고보니 포틀랜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조차 이상하네. 역시 이상한 도시다.
나중에 미국 1년 살기를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미국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입든지 어떤 머리를 하든지 서로 신경을 쓰지 않는 곳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우체국 박스 6개에 가득 담아 보냈던 내 옷 중 실제로 즐겨 입는 옷은 추리닝밖에 없다.
하지만 포틀랜드는 미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보다 반 발자국 이상 더 나간 것 같다. 1년간 여행을 다녔던 미국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 포틀랜드에서 쿠키몬스터, 락스타, 이외에도 묘사하기 어려운 머리 스타일 등을 자주 마주쳤다.
다른 도시 여행에선 꼭 방문해야 할 장소들을 미리 정한 뒤 그 리스트를 중심으로 움직이곤 했다. 가령 뉴욕에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엔 꼭 가봐야 하고 시카고에선 도시 건축물을 둘러보는 리버 크루즈를 꼭 타봐야 하고.
하지만 포틀랜드에선 발길 닿는대로 산책하듯 그냥 걸었다. 포틀랜드에선 천천히 걷는 것을 추천한다. 빠르게 지나가면서 미처 못 본 매력이 전봇대 한켠에, 전선 위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가 발견한 포틀랜드의 매력을 서로 나누어 이야기해보고싶다. 먼저 내가 발견한 것부터 소개하자면, 덮이고 찢긴 전단지 사이에서 악마의 메탈 음악 행사를 소개하는 전단지를 마주쳤다. 그리고 푸드트럭 간판 구석 한켠에 콜럼버스 그림과 함께 ‘모든 정복자들은 쓰레기(All colonizers are basters)’라고 적힌 아주 작은 스티커를 발견했다. 나이트 마켓 입장을 기다리면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을 땐 누군가 높이 던져 전깃줄에 걸어 놓은 신발 두 켤레가 대롱거리는 모습을 봤다.
무엇보다 내 체크무늬 치마를 보고 차 창문을 열어 예쁘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 준 사랑스러운 이들을 만났다.(칭찬은 언제나 나를 춤추게 한다.) 내 눈에 비친 귀여운 포틀랜드, 어떻습니까 여러분에 보기에도 귀엽나요?
그런데 사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포틀랜드 여행에 다녀온 이후 뒤늦게 밀 엔즈 파크(Mill Ends Park)’라는 곳을 알게 된 것. 이 곳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지름 61cm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원이다. 언론인 딕 페건이 방치돼있던 작은 공간을 청소하고 꽃을 심으면서 탄생했다.
이 작은 공원엔 전설도 존재한다. 어느날 요정 레프리컨이 구멍을 파는 모습을 페건이 발견하자, 요정은 자신을 놓아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페건은 공원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정확한 공원의 크기를 지정하지 않아서 이렇게 작은 공원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후 페건은 레프리컨과 밀 엔즈 파크에 대한 칼럼을 시리즈로 연재했다. 페건의 칼럼이 큰 인기를 끌면서 밀 엔즈 파크는 1971년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1976년엔 포틀랜드의 정식 공원이 됐다.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레프리컨을 볼 수 있는 인물인 페건은 1969년 세상을 떠났지만 포틀랜드 구성원들은 여전히 레프리컨과 공원의 전설을 사랑하며 가꾸고 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전설을 가진 공원을 포틀랜드에서 못 보고 돌아오다니. 특별한 이유 없이도 폭 빠져버린 포틀랜드에 이제 한 번 더 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