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 자이언 & 브라이스 & 엔텔롭 캐년
나에겐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괴상한 특징이 몇 가지 있다. 패키지 여행을 다녀오면 집에 도착한 뒤엔 신기하게 여행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십몇년 전 친구와 다녀온 필리핀 보라카이 패키지 여행에서 그나마 기억나는 점은 자유시간 때 해변을 걷다가 받은 헤나 타투 정도다.(유명한 침대 광고처럼 종아리 전체를 덮은 별 다섯개 타투 덕분에 약 2주간 회사에서 온갖 놀림을 받았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이상하다.)
몇년 전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일본 오사카, 교토 패키지 여행에선 절인 오이를 통으로 꼬치에 꽂아 팔던 길거리 간식 정도가 명확하게 기억난다.
반대로 자유여행을 다녀오면 세세한 부분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프랑스 파리 에펠탑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가 내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기 위해 어떤 포즈로 촬영을 했는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마주친 현지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감독이 누구인지까지 기억난다. 그런걸 보면 아마 나는 아마 직접 여행을 짜고 좌충우돌 부딪히는 과정을 꽤나 즐기나 보다.
비슷한 사례가 하나 더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간 길을 이상하리만치 잘 기억하지 못 한다.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여기 처음 온 길이지?” 라고 물으면 “아니 최소 n번은 와봤어”가 기본 대답이다.
이건 아마 운전을 하지 않고 늘 조수석에 타기 때문인 것 같다. 길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는 만큼 기억력도 떨어지는 셈.
반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던 길은 자유여행의 기억처럼 명확하게 남는다. 그 결과 패키지보다 자유여행을, 다른 교통수단보다 걷는 것을 선호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야 내가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으니까.
캐년 여행 계획을 짤 때 고민했던 첫 번째는 ‘패키지 대 자유여행’이었다. 캐년 여행은 각 캐년 간의 이동 거리도 길고 신경써야 할 부분이 꽤 있어 패키지 여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 경우, 패키지로 가면 의지와 상관없이 여행의 상당 부분을 흐릿하게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았다. 일생에서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캐년 여행을 두고 두고 기억에서 꺼내 우려먹고 싶었다.
무엇보다 미국 내에서 드는 비용을 기준으로만 봐도 패키지 여행이 자유여행보다 훨씬 비쌌다.(언제나 돈이 가장 큰 이유다.) 그래서 낭만 있는 척 로드트립으로 결정.
다음 고민은 ‘캐년 몇 개를 보고 나면 비슷 비슷한 풍경에 혹시 금방 흥미를 잃지 않을까’ 였다. 캐년마다 특징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라는 점에선 비슷한 풍경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고민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없는 고민도 만들어내는 성격을 가진 인간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이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한 일은 각 캐년마다 꼭 걸어보고 싶은 트레일 정하기. 그랜드 캐년에선 엄청난 규모의 협곡 아래로 내려가볼 수 있는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Bright Angel)’을 걷기로 했다. 자이언 캐년은 흐르는 계곡 속을 직접 헤치며 걸어가는 ‘더 내로우스 트레일(The Narrows)’로 정했다. 브라이스캐년에선 거대한 붉은 암벽 사이로 깔린 모래길이 인상적인 ‘나바호 루프 트레일(Navajo Loop)’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엔텔롭 캐년은 좁은 협곡 틈새를 구불 구불 걷는 투어를 예약했다.
각 트레일마다 난이도도, 경치도, 특징도 모두 다르다. 얼마나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까. 길을 걸으면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트레일을 찾았을 뿐인데 캐년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한없이 부풀어 올랐다.
첫 번째 하이킹은 실망을 안고 시작했다. 가장 기대했던 코스인 자이언 캐년의 ‘더 내로우스’를 날씨로 인해 가지 못하게 됐다. 더 내로우스는 자이언 캐년의 거대한 암벽 사이 계곡물 속을 걷는 코스다. 길이 아닌 물을 걷는다는 독특함 덕에 인기가 많지만 그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맑은 날씨가 되길 그렇게 기도했건만 밤 사이 엄청나게 내린 비로 기온이 뚝 떨어져버렸다.
과장 조금 보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대신 ‘카옌타 트레일 (Kayenta)’을 걷기 시작했다. 카옌타 트레일은 자이언 캐년 전경과 함께 에메랄드 풀을 볼 수 있는 코스로 유명하다. 여전히 아쉬움을 던져버리지 못한 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던 그 때 눈 앞에 옅은 폭포가 나타났다.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물방울이 햇빛과 만나 반짝거렸다. 길은 폭포 바로 뒷편으로 이어졌다. 곱게 짠 면사포같은 폭포수를 바로 뒷편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트레일을 걷는 내내 입이 튀어나온 채 제대로 전경을 즐기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더 내로우스를 걷지 못해서 실망하고, 그 감정을 가지고 카옌타 트레일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 해서 후회하고. 이래 저래 못났다 정말.
그랜드 캐년에서 걸었던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공포였다. 이 트레일은 그랜드 캐년의 절벽을 따라 좁은 길을 걸으며 콜로라도 강까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코스다. 좁디 좁은 길을 내려가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절반씩 나눠 썼고 바로 옆은 당연히 절벽이었다.(미국 국립공원은 안전장치를 설치한 경우가 드물다. 현지인에게 물어본 바로는, 자연을 최대한 그 자체로 놔두는 것이 목적인데다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에선 본인 부주의로 발생한 사고는 본인 책임이라고 한다.)
그랜드캐년의 높이가 엄청난 만큼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는 데는 하루 이상이 걸린다. 남편과 나는 중간에 물과 화장실이 있는 휴게 지점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약 1시간 동안 절벽을 바로 옆에 두고 미끄러운 흙바닥을 내려가면서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고개만 살짝 돌리면 광대한 그랜드 캐년이 펼쳐져 있는데 내 시선은 바닥에만 꽂혀 있었다. 하지만 잠깐씩 용기를 내 감상했던 그랜드캐년의 경치, 길 위에서 마주친 다람쥐와 노새 등은 잊을 수 없다.
휴게 지점에서 주먹밥을 먹은 뒤 이제 반대로 왔던 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했던 점은 오르막 경사 덕분에 몸이 힘들어지자 절벽에 떨어지면 어쩌나 두려움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래서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라고 하나보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투어를 예약한 곳은 엔텔롭 캐년이었다. 엔텔롭 캐년은 나바호족 가이드와 함께 걷는 투어 통해서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협곡 사이로 난 좁은 틈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땅 위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드러났다. 구불 구불 물결 치는 듯한 암벽이 모두를 둘러싸고 있었다. 붉은 빛을 띄고 있지만 햇빛의 각도와 강도에 따라 연한 베이지색부터 오렌지색, 때로는 보랏빛까지 다양한 색상으로 빛났다. 다양한 곡선이 만들어낸 면들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과 붉은 벽 사이의 색상 대비를 감상하다보니 1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브라이스 캐년은 사실 다른 캐년에 비해 기대감을 덜 가졌던 곳이다. 침식 작용으로 만들어진 첨탑 모양의 후두(Hoodoo)가 유명하다고는 하나 그랜드캐년보다 광대함이 덜하고 엔텔롭캐년보다 신비로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나와 해돋이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수백 수천 수만개의 후두 지형 위로 오늘의 첫 햇살이 와닿는 광경은 예상치 못한 감동을 선사했다. 해돋이 후 걸었던 길은 더 특별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후두들은 뾰족하면서도 동그랗고 울퉁 불퉁하면서도 매끄러웠다.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감각 속에서 동화의 어느 한 장면으로 초대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앨리스가 들어간 원더랜드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런 길도 걸었을 것 같다.
길을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과 감상이 흘러나오다니. 역시 모든 캐년은 각자의 특징이 있고 똑같은 길은 없나보다. 덕분에 다음 또 다른 길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