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망한 여행을

시애틀(Seattle), 워싱턴주

by 고라니

이 글은 나의 실패한 여행 기록이다.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꾸준히 악재(라고 쓰고 나의 바보같은 부주의라고 읽는다.)가 끊이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고 나니 이번 시애틀 여행의 컨셉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망한 여행’ 체험이 된 듯도 싶다.


응원 속 달리기


시작은 출발 당일 새벽 애틀랜타 공항에서였다. 새벽부터 바지런히 차를 몰고 이동해 공항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제공하는 셔틀을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한 여성이 차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며 다급하게 셔틀을 다시 세웠다. 으이그 진작에 꼼꼼하게 좀 챙기지. 남편과 한국어로 정신머리가 없다고 속닥거리고 흉을 봤다.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게 내 소지품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신이 주신 기회라는 것도 모른채.


셔틀은 문제 없이 공항에 우리를 내려줬고 위탁수하물을 매끄럽게 처리한 뒤 짐 검사 줄을 찾아 섰다. 비행기 보딩 시각은 오전 7시 20분. 현재 시각은 오전 6시 35분. 보딩 시간까지 불과 45분을 남겨놓고 깨달았다. 남편과 나 둘 다 미국 운전면허증을 차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tempImagedhTLGz.heic 이 때는 몰랐다. 운전면허증을 차에 두고 와서 재차 왔다갔다 하게 될 줄을.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에서 각각 올림픽 국립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렌트카를 빌려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현지 운전면허증은 필수였다. 고민 따위는 사치. 남편과 나는 곧바로 줄에서 나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들을 이리 저리 피하며 길을 텄고 남편은 기내용 캐리어를 거의 들고 뛰다시피했다.


다시 셔틀을 타고 주차장에 간 뒤 차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내 공항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전 7시. 보딩 시간까지 20분이 남은 상태에서 내 눈앞에 보인 광경은 짐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엄청난 인파였다.


평소에 영어로 먼저 말을 거는 것을 정말 꺼리지만 그런 체면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공항 관계자를 붙잡고 비행기 놓치겠다고 사정을 했다. 공항 관계자는 세상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답했다. 줄이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 수도 있으니 일단 기다려보라며. 그렇게 10분 20분 30분…을 넘게 기다렸고 이미 보딩 시간은 한참 지나버렸다. 나는 이제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의 다음 비행기편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뚫고 가자”

운전면허증을 두고 온 1등 죄인인 남편이 제안했다. 그래 부끄러운 순간은 잠깐일거야. 최대한 미간을 찌푸리고 눈썹을 늘어뜨리며 눈가가 촉촉해진 상태로 앞 사람에게 “Excuse me”를 시작했다.


“우리 비행기 보딩 시간이 지나서 그런데 앞으로 먼저 갈 수 있을까?”

어깨가 축 처진 동양인 부부가 불쌍해보여서였을까. 원래 미국인들은 이렇게나 친절한 것일까. 그 때부터 줄 앞쪽이 시원하게 뚫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어서 지나가라고 길을 비켜주고 아예 이쪽으로 오라고 자리를 만들어줬다. 연신 쏘리를 반복하며 한 명 두 명 제칠수록 비행기와 나 사이의 거리도 점차 좁혀지는 듯 했다.


tempImagetK3Cz2.heic 화려하게 탑승을 환영해준 알래스카 항공. 땡큐!


드디어 짐 검사까지 마친 뒤 기다렸다는 듯이 질주하는 우리의 뒷편으로 “유 캔 두잇” 응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뜀박질해본 적이 있을까. 지루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에게 우리 부부는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구경거리로 충실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비행기 출발 4분 전인 오전 7시 54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에서 비행기를 탔고 우리를 마지막으로 게이트가 닫혔다. 정말 고맙습니다. 애틀랜타 시민 여러분.


단짠단인줄 알았는데 단짠짠


어렵게 도착해서였을까. 시애틀의 구름 낀 하늘은 도시의 분위기를 더 깊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고 워싱턴대의 벚꽃길은 고풍스러운 학교 건물과 어우러져 더 우아해보였다. 스타벅스의 도시답게 1호 매장에 가서 마신 커피 한 잔은 무엇보다 특별했다. 심지어 해질녘 하나 둘 도시에 주홍빛이 들어오는 모습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불빛같이 느껴졌다. 시애틀 첫 날 내 기분이 그랬다. 들뜨는 축제 기간을 맞이하는 기분.


둘째날 시애틀은 놀라울 정도로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모든 것은 나의 어리석음에서 시작된다.

둘째날 계획은 시애틀 인근 올림픽 국립공원으로 렌트카를 타고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7시 즈음 렌트카 지점에 도착해 예약 내역을 확인하고 미국 뱅크 오브 아메리카 체크카드를 건네는 순간, 디파짓 결제는 신용카드만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아차, 미국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면서 디파짓은 늘 신용카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하필 신용카드를 호텔에 두고 왔다. 늘 가지고 다녔던 신용카드인데 하필 딱 그 날만 왜 두고 나왔을까. 하는 수 없이 호텔에 다시 다녀가고 렌트카 지점에서 또 줄을 서느라 예약시간보다 약 1시간 반 이상 지체됐다.

나중에 생각난 사실은 내 신용카드는 애플페이에 저장돼있어서 굳이 호텔에 다시 다녀오지 않더라도 그냥 애플페이 결제를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tempImagescXuqZ.heic 트레일 곳곳이 closed 지만 그래도 텐션 끌어올려!


우여곡절 끝에 렌트카를 타고 올림픽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 우리의 목표는 가장 유명한 길인 허리케인 릿지(Hurricane Ridge)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4월 초 시애틀 인근 국립공원은 눈이 잔뜩 쌓여 있어 길이 열려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홈페이지에는 폐쇄했을 수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알쏭달쏭한 말만 써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일단 도전! 그리고 3시간 후 도착한 안내소에는 ‘closed’라고 써 있을 뿐이었다.


tempImagec2ZxT9.heic 영화 트와일라잇 속 뱀파이어를 상상하며.


안 된다. 이렇게 여행을 짠내 나게 포기할 순 없다. 열려 있는 다른 트레일을 찾아 차를 몰고 이동했고 그 곳에서 멋진 우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올림픽 국립공원은 그 유명한 영화 트와일라잇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영화 속에 내가 걷고 있는 이 지역도 등장했을까 생각하며 우림 속을 걸으니 마음이 다시 달달해졌다. 조금 후 차로 돌아오자 마침 비까지 퍼부어 의자를 젖히고 누웠다. 선 루프를 열고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순간을 커피와 과자를 먹으며 즐겼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다시 약 3시간이 걸려 시애틀에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 7시 반이었다. 나는 몰랐다. 시애틀은 오후 5시 이전에 상점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다는 것을. 식당은 이미 다 닫은 상태였고 술을 파는 펍으로 들어갔더니 25분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를 들었다. 다른 곳을 찾을 체력이 없어 핸드폰 번호를 남긴 뒤 대기했지만 30분이 지나도록 들어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우리는 구글맵에서 새벽까지 여는 것으로 표시돼있는 호텔 근처 포장 전문 피자가게를 찾았고 그 쪽으로 미련없이 이동했다. 하지만 ‘영업중’이라고 써 있는 구글맵과는 달리 가게는 한참 전에 이미 문을 닫은게 분명해보였다. 그 순간 우리가 버리고 나간 펍에서 문자가 왔다. “지금 입장 가능”. 하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나와버렸다.


시작부터 소소하게 꼬이던 내 여행은 결국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호텔방에 들어와 침대에 드러눕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중요한 소지품을 자꾸 빠뜨린 것도 내 실수이고 시애틀 상점 폐점 시간을 확인하지 않은 것도 내 잘못이긴 한데…그래도 시애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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