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피렌체, 이탈리아
이 세상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고대 로마의 엄청난 유적에 아름다운 자연환경, 훌륭한 음식까지 갖춘 이 나라 여행을 꺼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습게도 그게 바로 나다.
소신발언 하겠습니다! 저는 이탈리아 여행을 싫어했습니다.(과거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경험을 들으면 누구라도 이 감정을 이해할 것이라 확신한다.
지금으로부터 1n년 전 대학생 시절, 친구와 야무지게 유럽여행 코스를 짰다. 헤쳐 보여 방식으로 먼저 각자 원하는 나라를 방문한 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다시 합체해 여행을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밀라노에서 합체하기로 한 날. 몇 시간 앞서 도착한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친구를 맞이하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 예정시간이 지나고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내 친구는 없었다.
어라? 이상한데. 설마 나랑 엇갈린건가?
혹시나 친구가 나를 못 보고 게스트하우스에 홀로 갔을 수도 있겠다 싶어 서둘러 돌아갔지만 그 곳에도 친구는 없었다. 실시간으로 연락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그렇다. 놀랍게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때부터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타고 온 기차에 문제가 생겼으면 어쩌지. 친구가 게스트하우스를 못 찾고 길을 잃었으면 어쩌지. 친구가 혹시 안 좋은 일을 당했으면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의 연속.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게스트하우스에서 컴퓨터를 빌려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 후 기차역까지 20~30분 가량 걸리는 길을 왕복으로 걸으며 혹시나 어딘가에서 헤맬지도 모르는 친구를 찾았다. 중간 중간 마주친 사람들에게 요만한 키에 눈이 동그란 동양인 여자애를 봤냐는 질문도 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도록 수도 없이 기차역과 게스트하우스를 왕복하던 내가 겪은 일은 다음과 같았다.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 방지 차원에서 그날 내가 입었던 옷은 무릎 정도 길이의 검은색 원피스였다.)
1. 게스트하우스 인근에서 가게를 하고 있다고 소개한 젊은 남성이 본인 가게에 네 친구가 있다며 같이 그쪽으로 가자고 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2. 대로변을 따라 걸을 때마다 자꾸 내 옆에서 차를 세운 뒤 운전자가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었다.
3. 너무 잦은 빈도로 차가 내 옆에서 멈추자 한 번은 마음 먹고 가까이 다가가 영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운전자는 즉시 차 안에서 상의를 벗더니 성적 의미를 담은 행동을 취했다. 그동안 멈춰선 운전자들이 나에게 말했던 이탈리아어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4. 이 길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지만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르는 친구를 생각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10대 청소년 몇명이 내 허리와 엉덩이를 만지고 빠르게 도망쳤다.
그 길을 몇 번이나 왕복했을까.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친구에게 온 이메일이 없는지 확인하러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자 이메일 대신 친구가 앉아 있었다. 알고보니 예매한 기차가 운행을 하지 않아 급하게 다른 교통수단을 알아본 뒤 돌아 돌아 밀라노에 겨우 도착했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었는데 계속 받지 않아서 나에게 상황을 알릴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왈칵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펑펑 울면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설명하자 친구도 함께 눈물 콧물을 쏟았다. 친구는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밀라노에서의 기억을 최악으로 끝낼 수는 없으니 잠시 구경이라도 하고 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10대 청소년들이 뿌린 물벼락을 함께 맞았다.
밀라노에서의 경험이 강렬하다보니 내 평생 다시 이탈리아에 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올해는 마침 25년 주기로 돌아오는 희년(Holy Year)이었고 콜린 매컬로의 대작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고 있었으며 비행기 티켓까지 저렴했다. 또 다시 실망할지 아니면 반전 매력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 가보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수도 없이 자주 듣고 읽었던 이 문장이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지 로마에 직접 와보고 실감했다. 도시 곳곳에 로마 제국의 흔적들이 무심한듯 평범한듯 분포돼있었다.
화면 속으로만 봤던 콜로세움은 또 얼마나 거대한지. 내부에 들어가서 그 당시 관객석에 서서 경기장 중심을 바라보니 영화 글레디에이터 속 주인공의 결투 장면이 저절로 떠올랐다. 고대 로마 제국민들은 이 곳에서 검투사의 혈투, 물을 채워 진행하는 가상 해전까지 즐겼겠구나. 과거 로마의 누군가가 서 있던 이 자리에 역사의 흐름을 거쳐 현재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자리엔 또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의외로 가장 흥미로웠던 장소 중 하나는 포로 로마노였다. 이 유적은 개선식과 연설, 즉위식 등 국가 중대사가 열린 고대 로마의 중심지라고 한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 시대 로마의 시가지가 어떤 모습인지, 로마 정치인들이 연설을 했던 광장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으로 궁금증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포로 로마노 곳곳을 걸으며 고대 로마의 정치와 생활상을 직접 느껴볼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부분이 허물어지고 형태를 알 수 없었지만 뭐 어떠리. 남은 부분은 상상으로 채우는거지.
로마 시내와 유적이 고대 로마제국을 느낄 수 있는 곳들이라면 바티칸은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부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천장화와 피에타 조각까지. 미술책에서만 보던 작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경건해졌다.
특히 성베드로대성당 성년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은 카톨릭 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성년의 문은 희년인 25년마다 열리는 문으로, 이 곳을 지나가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줄을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통과하며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었던 죄가 조금이나마 용서받길 기도해봤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하루는 피렌체에 가보기로 했다. 나에게 피렌체는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20살 대학생 때 여름방학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선배가 기념품과 피렌체 전경 사진 한 장을 선물로 주며 언젠가 이 곳에 내가 꼭 한 번 가봤으면 한다고 말했다.(왜 나에게 선물을 줬는지, 피렌체에 가보면 좋겠다고 말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 선배와는 다양한 사건 끝에 연락이 끊겼지만 그 사진만큼은 아직도 지갑 속에 넣어두고 있다.
피렌체에 왔으니 사진 속 그 풍경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망대로 유명한 두오모 성당일까 조토의 종탑일까 아니면 베키오궁일까.
정답은 미켈란젤로 광장이었다. 시내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덕에 사진 속에 있었던 동그란 두오모 성당의 지붕을 포함해 피렌체 전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 오랫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풍경이 실제로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심지어 살짝 구름낀 날씨마저 똑같았다. (옆에서 열심히 컵 3개를 돌려가며 주사위 숫자를 맞추라고 호들갑 떨던 야바위꾼은 그때도 동일했을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묵혀둔 숙제를 풀어낸 느낌은 꽤나 경쾌했다.
이제는 이탈리아를 향해 (나혼자) 묵혀뒀던 감정을 풀고 새로 나아가볼까 한다. 알겠냐 이탈리아?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