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Lisbon), 포르투갈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스위스의 한 교수가 야간열차를 타고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해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70년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배경, 그 시대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2010년대 현재의 모습은 영화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하지만 여행자 입장에서 무엇보다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리스본의 풍경이다. 구불 구불 이어진 좁은 골목길, 그 길을 달리는 노오란 트램, 겹겹이 쌓인 주홍빛 지붕까지 도시의 매력은 잔잔하게, 하지만 풍성하게 펼쳐진다.
결국 동명의 소설 원작을 읽거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리스본이라는 도시에 궁금증을 갖게 된다. 실제로 가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느낌일까.
리스본에 도착해 가장 먼저 체감하게 된 부분은 골목과 계단이었다. 좁디 좁은 골목이 구부러졌다가 갑자기 확 펼쳐지고 다시 휘감아 올라가는 식이어서 혼이 쏙 빠저버렸다.
특히 트램을 타고 달리면 이 길의 특징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차도 지나가기 힘들 정도의 좁은 골목을 트램이 요리 조리 빠져나가며 리스본 곳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어떤 순간엔 골목길 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트램이 종잇장 수준으로 아슬 아슬하게 비켜 나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다른 순간엔 덜커덩 달리는 트램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묘기같은 승차를 경험했다.
전깃줄을 따라 정해진 길을 달리는 모습은 질서있는 듯 보이지만 이를 둘러싼 자유로운 골목길과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은 무질서 그 자체다.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를 경험하기 위해 나를 포함한 여행자들은 끊임없이 트램 위에 올라섰다.
리스본 골목과 트램이 이렇게나 여행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데는 이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 리스본 시민들의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리스본은 1755년 대지진과 화재, 쓰나미로 도시 대부분이 무너져버린 아픔을 가지고 있다. 당시 대지진은 약 5분 만에 리스본 건물의 80% 이상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이후 쓰나미가 몰려들었고 화재는 5일 동안 도시를 불태웠다.
도시를 재건해야 하는 리스본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깔끔하고 반듯한 계획도시가 되느냐, 아니면 기존의 어지러운 골목과 계단을 보존하느냐. 리스본은 옛 도시의 자취를 남기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는 현재 리스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도시의 매력으로 떠올랐다.
좁은 골목길과 계단의 끝까지 오른 여행자들이 만날 수 있는 선물도 있다. 그건 바로 전망대. 리스본 도시 곳곳에는 무료 전망대가 있다. 덕분에 누구나 골목의 끝에서 멋진 풍경을 선물받는다.
전망대마다 매력이 다르니 여행기간 동안 될 수 있는대로 다양한 곳을 경험하고 싶었지만 2박 3일 일정에선 4곳이 최선이었다.
포르타스 두솔 전망대와 산타루치아 전망대는 위아래로 가깝게 붙어 있어 한 번에 방문하기 편리하다. 주홍빛 지붕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 앉은 모습, 그 너머로 테주강이 펼쳐진 풍경은 정말 선물 같이 느껴졌다. 해가 질 무렵 찾은 세뇨라 두 몬테 전망대에선 현지인, 여행자 할 것 없이 다들 담벼락에 앉아서 해가 점점 아래로 잠겨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봤다.
다음날엔 상 페드로 드 알칸타라 전망대로 향했다. 이 곳에선 리스본의 구시가지와 상조르즈성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노을이 지면서 황금빛으로 보랏빛으로 번져 나가는 풍경을 감상한 뒤 샛노란 푸니쿨라 ‘아센소르 글로리아’ 노선을 타고 아래로 다시 내려갔다. 푸니쿨라는 트램과 함께 리스본에서 사랑받는 대중교통이다. 트램보다 다소 작은 크기로 고지대와 저지대의 가파른 경사를 잇는다.
하지만 아센소르 글로리아 노선 푸니쿨라가 2025년 9월 4일 큰 사고가 났다. 한국인 여행자를 포함해 여러 승객들이 피해를 입었다. 나에게 행복한 기억을 준 푸니쿨라가 누군가에게 비극이 됐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어본다.
리스본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만으로 유지되는 도시가 아니다. ‘유럽의 실리콘밸리’라 불릴 만큼 몇년 전부터 가장 주목받는 혁신 도시이기도 하다.
그 중심엔 인재를 끌어들이고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있다. 리스본은 ‘유니콘 팩토리’라는 창업 허브를 설립해 수백개의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다. 덕분에 수많은 일자리가 새로 생겼고 다양한 나라에서 12개의 유니콘 기업이 리스본에 진출하는 성과를 얻었다.
세계 최대 스타트업 행사인 ‘웹서밋’이 개최되는 장소도 바로 리스본이다. 웹서밋엔 매회 7만명 이상의 참석자들과 수천 곳의 스타트업, 그리고 투자자들이 모인다. 이는 경제 활성화를 넘어서 리스본의 가치를 끌어 올리는 근본적인 효과로 이어진다.
여행자부터 스타트업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을 보면 역시 매력이 넘쳐 흐른다 리스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