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없이 작품의 매력을 잘 전달하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했지만 매우 어렵더군요. 그래서 미리 경고드립니다. 작품의 내용이 잔뜩 포함돼있습니다.
'장송의 프리렌'은 참 이상한 애니메이션입니다.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용사(힘멜)와 마법사(프리렌), 성직자(하이터), 전사(아이젠)가 모였지만 막상 마왕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야기의 출발은 마왕을 쓰러뜨린 후 금의환향하는 일행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악한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끝마쳐야 할 시점에 오히려 이야기가 시작된다니! 이 사실만으로도 ‘장송의 프리렌’이 가진 매력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영웅이 된 일행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수십년의 시간이 다시 고요하게 흐릅니다.
천년 이상을 사는 엘프 프리렌은 여전히 같은 모습이지만 그 사이 용사 힘멜은 서서히 늙어가며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장례식 내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프리렌은 힘멜과 작별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인간을, 특히 늘 곁에 있던 힘멜을 제대로 알아보려하지 않았던 자신을 탓합니다.
이 부분이 바로 프리렌의 진짜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장송의 프리렌’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요즘 제 고민과 맞닿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엔 공 하나만 있어도, 떡볶이만 함께 먹어도 금방 허물없는 친구 사이가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조건과 생각의 차이가 항상 한 발 앞서 벽을 만들어버리더군요. 결국 요즘 제 고민은 이거였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힘멜을 이해하기 위한 프리렌의 모험에는 새로운 일행이 생겼습니다. 성직자 하이터의 부탁으로 가르치게 된 제자 페른, 그리고 전사 아이젠의 제자인 슈타르크입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을 타고 계속 흐르는 개념인가 봅니다.
이제 프리렌과 페른, 슈타르크는 ‘용사 힘멜의 죽음으로부터 00년 후’를 기점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프리렌은 여전히 인간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지만 힘멜이 중간 중간 남겨 놓은 믿음의 씨앗들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변해갑니다. 물론 자주 삐치는 페른과 겁쟁이 슈타르크는 우당탕탕 새로운 모험에 큰 힘이 되고요.
여기까지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요즘 고민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됐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노력하는 한은'
타인을 이해하면서 한뼘 더 성장하는 프리렌처럼. 평생 프리렌을 단단하게 믿어줬던 힘멜처럼 말이죠.
이 세계관에서 마법은 상상하는 만큼 실현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로운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프리렌이 마왕을 물리쳤고, 인간의 시대를 상상할 수 있는 제자 페른이 다음 세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스승은 제자가 새로운 시대를 무탈히 맞이할 수 있도록 기본을 가르치고 충분히 지지해줍니다.
마족 잔당들이 곳곳에 남아있긴 하지만 마왕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 스승 프리렌이 제자 페른에게 가르친 마법은 어떤 것일까요
페른이 배운 공격 마법은 의외로 기본 중의 기본인 졸트라크 단 하나뿐입니다. 프리렌은 현 마법사들은 졸트라크 하나만 알면 된다며 다른 공격 마법은 아예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공격 마법 대신 ‘장송의 프리렌’을 가득 채우는건 평범한 마법들입니다.
일단 프리렌이 가장 좋아하는 마법은 꽃밭을 만드는 마법입니다. 이는 프리렌의 스승인 플람메가 좋아하는 마법이자, 프리렌과 힘멜이 동료가 될 수 있게 해준 마법이기도 합니다.
페른은 또 어떻고요. 1급 마법사가 된 상으로 원하는 마법을 하사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선택한 마법은 옷의 더러움을 말끔히 없애는 마법이었습니다. 무려 신화 시대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전설급 마법이라고 합니다.
이밖에 찌든 때를 지우는 마법, 잃어버린 장식품을 찾는 마법, 빙수를 만드는 마법, 동상의 녹을 깨끗하게 닦는 마법 등이 등장한답니다.
저는 이 세계관을 가득 채우는 마법이 엄청나게 거대한 파괴가 아니라 일상을 조금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마법들이라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진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무언가보다는 이런 작은 것들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프리렌이 작품 속에서 앞으로도 꽃밭을 만들며 성장해 나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