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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로맨틱이란

찰스턴(Charleston), 사우스캐롤라이나주

by 고라니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찰스턴은 다른 모든 도시가 그러하듯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가령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하는 내 친구 A에게 찰스턴은 주인공 레트 버틀러의 고향이자 남북전쟁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실제로 찰스턴은 미 건국초기 노예무역의 중심지였으며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운영되는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유명했다.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 끝난지 150년이나 지난 2015년에도 흑인교회인 이매뉴얼 아프리칸 감리교회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기 난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희생자 장례 예배에 참석해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부르며 인종 갈등을 넘어선 화합을 강조했다. 아마 누군가에겐 반주 없이 서서히 울려퍼진 그 노랫소리가 찰스턴에 대한 첫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tempImageCC48WW.heic 영화 노트북에선 주인공들이 '분홀 플랜테이션'의 떡갈나무길을 신나게 자전거로 내달린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찰스턴이란?

슬프고도 안타까운 역사와는 다른 결이라 짐짓 부끄럽지만 나에게 찰스턴은 로맨틱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찰스턴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면서 동시에 2004년에 개봉된 영화 ‘노트북’의 배경이기도 하다. 노트북은 가난한 청년 노아(라이언 고슬링)와 여름 휴가를 맞아 잠시 휴양을 온 부잣집 아가씨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의 사랑 이야기다.


너무도 다른 가정 환경을 극복하고 서로를 택하며 평생동안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라니. 외계인의 지구 침공보다 오히려 더 현실과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매력이다. 떨어질 것을 알면서 매주 사모으는 로또처럼, 현실에선 일어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점을 알면서도 자꾸 보게 되는 기적의 로맨스랄까.

유사품으로는 잘 나가는 미국 영화배우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영국에서 망해가는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이혼남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와 사랑을 이루는 영화, ‘노팅힐’이 있다.


그렇다. 노트북을 10번쯤, 노팅힐을 100번쯤 (노트북은 분명 명작이지만 노팅힐을 더 애정한다) 본 나에게 있어서 미국 찰스턴, 영국 노팅힐은 로또 같은 사랑을 품은 도시다.


tempImage49LxaT.heic 영화 노트북 여자 주인공 앨리 가족의 여름 별장으로 등장하는 '분홀 플랜테이션' 건물.


문제는 항상 더위야


노트북 성지 투어답게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주인공 앨리의 여름 별장으로 나온 ‘분홀 플랜테이션(Boone Hall Plataion)’이다. 이 곳에서 앨리와 노아는 거대한 떡갈나무 길을 자전거로 질주하고, 보트를 타며 깔깔 웃어대기도 한다. 서로에게 벼락처럼 빠져들어 강렬한 감정을 분출하는 장면 장면이 분홀 플랜테이션에 스며들어 있다.


물론 이 곳은 영화 속 낭만적인 배경과는 달리, 실제로는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을 떠나 팔려온 노예들이 하루 종일 목화와 농작물을 생산해야만 하는 농장이었다. 주인 가족이 살았던 대저택 앞쪽에 주욱 늘어서 있는 당시 노예들의 거처가 슬픈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새하얗고 거대한 저택과 어두운 고동빛의 작은 집들은 당시의 불평등한 삶의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하게 만든다.


이 집들을 포함해 정원, 농장, 떡갈나무 길까지 명색이 플랜테이션이다보니 둘러봐야 할 곳들도 많고 규모도 엄청났다. “여기가 영화에서 배를 탔던 곳인가봐”, “아빠가 여기에 앉아있다가 앨리와 노아의 연애를 우연히 봤겠구나” 등 신이 나서 끝도 없이 남편에게 종알 거렸다.


그 와중에 노트북 영화의 팬이라서 이 곳에 꼭 와보고 싶었다는 국제부부(한국인 아내+미국인 남편)까지 우연히 만나 신나게 영화 장면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영화에 흠뻑 젖어 분홀 플랜테이션과 아메리칸 극장(노트북에서 앨리와 노아가 데이트를 하던 장소), 찰스턴 도심 곳곳을 누비니 마치 내가 영화 속 단역 1이라도 된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야말로 흥분 지수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tempImagei0OVVB.heic 영화 노트북의 명장면이 이 곳 '사이프러스 가든'에서 탄생했다.


흥분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만나 둘의 사랑을 확인한 사이프러스 가든(Cypress Garden)은 이번 여행의 핵심이었다. 사이프러스 가든은 호수 속에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어 검은 물빛과 울창한 나무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앨리와 노아가 이 곳에서 나룻배를 탄 뒤 빗 속에서 입맞춤을 하는 순간은 영화의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다. 덕분에 로맨틱한 순간을 꿈꾸는 연인부터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가족까지 모두가 이 곳에서 약 40분 코스의 나룻배를 탄다.


성인 허리 정도 깊이여서 구명조끼를 입지 않아도 되고 악어를 만나도 먼저 공격만 안 하면 괜찮다는 불안한 안전? 설명을 들은 뒤 나룻배에 탑승했다. 남편은 뒤에서, 나는 앞에서 각각 노를 하나씩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기가 노트북에서 둘이 마주보고 나룻배를 타던 곳이야. 몇 년간 떨어져 있을 때 앨리한테 약혼자가 생겼는데 여기에서 둘이 다시 만나고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여보 듣고 있어?”


호숫가에 표시된 방향을 따라 나룻배를 타고 들어갈 수록 신이 난 내 목소리만 퍼져 나갈 뿐, 남편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덩달아 나도 김이 팍 식어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적진에 몰래 잠입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둘이 앞만 보고 조용히 노만 저었다. 장소만 로맨틱하면 뭐해 현실은 군사작전인데 쳇.


점점 쌓여가는 불만을 못이기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어 뒤를 훽 돌아보는 순간, 미안함이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 남편의 모습은 누가 머리 위로 물 한 동이를 가득 들이 부은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더위, 그놈의 더위가 문제였다. 더위에 유난히 약하고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인 남편에게 여름은 쥐약이다. 그늘 하나 없이 40여분간 한여름의 땡볕에 오롯이 노출된데다 신이나서 노를 놔버린 내 몫까지 합해 노를 저어야 했으니 힘이 들 수밖에…(그 와중에 뒤에서 열심히 핸드폰으로 나를 찍는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리의 첫 여행이었던 홍콩에서도 그랬다.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이것도 봐야 하고 저것도 봐야 하는 내 발걸음이 빨라지는 만큼 남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뙤약볕 아래가 아니라 혼자 비 구름 아래 있던 것 마냥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의 로맨틱한 순간을 방해하는건 언제나 더위다.


tempImagewfj32v.heic 찰스턴 여행에서 숙박했던 호텔은 전형적인 미국 모텔 느낌이어서 미드 속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제는 사실 나였어


아니다. 다정한 순간을 망친건 사실 홍콩의 숨막힐 듯한 더위도, 찰스턴의 내리쬐는 직사광선도 아니었다. 내 흥에 취해 상대를 살피지 않은 나 때문이다.


남편은 항상 나를 배려한다. 아침, 저녁으로 내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혹시 바퀴벌레가 있는지 먼저 문을 열어 살핀다.(미국 주택에서 바퀴벌레 근절하는 법 아시는 분?)

전날 저녁으로 LA갈비를 맛있게 먹은 뒤 내가 배탈이 나면 혹시 기름기가 많아 그런걸까 고민하며 다음엔 갈비를 먼저 물에 삶은 뒤 굽는 조리법을 고민한다.(각자의 재능에 기반한 집안일 분배 법칙에 따라 우리집 요리 담당은 남편이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오늘도 고생 많았다며 내 다리를 주물러준다.(푹신함을 찾아서 남편의 배 위에 다리를 올리면 남편은 다리 안마를 해달라는 신호로 착각하고 그동안 내 다리를 주물러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다.)


남편의 배려는 사소하지만 따뜻하다. 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베어 들어가 하루 하루를 채워 준다. 아마 눈에 보이는 배려보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배려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렇듯 남편의 사랑은 배려의 모습으로 나에게 전달되고 있다. 벼락처럼 내 모든 것을 뒤흔들어놓은 채 사라지는 형태가 아니라 한결같은 온도로 따숩게 이어질 것이다.


영화 노트북이 좋았던 이유도 젊었을 적 불타오르는 사랑의 모습보다는, 노인이 된 현재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사랑이 평생동안 따뜻하게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내가 남편을 배려할 차례다. 40여분간 나룻배를 탄 뒤 원래는 호숫가 트레일을 걸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미 더위에 지친 남편에게 뙤약볕 아래 또 30~40여분간 걷자고 하는 대신, 그늘에 자리 잡고 자판기에서 시원한 콜라를 뽑아 건넸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늘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이 호수에 비치는 나무 그림자가, 반짝이는 윤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 나눴다. 그렇게 노트북의 배경지는 우리 둘에게도 로맨틱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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