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Chicago),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여행을 가기 전, 이 도시에서 경험해보고 싶은 일을 쭉 정리해봤다. 이전까지 시카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껏해야 뮤지컬 시카고에서 빌리 플린이 록시 하트를 무릎에 앉혀 놓고 복화술을 하는 순간 정도였다. 그리고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 ‘에밀리 인 파리’에서 주인공 에밀리의 고향 정도? 아, 영화 ‘나홀로 집에2’에서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가족들이 바쁘게 뛰어가던 공항이 시카고 오헤어 공항이라고 했던가.
결국 나에게 시카고란, “아 시카고 너무 좋지!”라고 생각할 순 있어도 막상 뭐가 좋은지 설명하자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신기한 곳이다.
하지만 시카고를 본격적으로 검색해보니 이전에 왜 이 도시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일단 시카고는 현대 건축의 상징같은 곳이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도시 상당 부분이 파괴되자 도시 곳곳에 하늘 위로 솟구친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을 다시 만들어냈다.
도시 전체에 미술 작품이 가득한 예술의 도시이기도 하다.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은 뉴욕, 보스턴과 함께 미국 3대 미술관으로 꼽히며 거리 곳곳에는 피카소, 샤갈, 미로 등 유명 작가들의 공공 조형물이 있다.
또 거대한 미시간호와 도시를 관통하는 시카고강은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시카고만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까지 알아보고 나니 시카고 여행 기간 내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그 멋지다는 건축물도 봐야 하고, 미술 작품도 감상해야 하고, 공공 조형물도 찾아다녀야 하고, 초록 빛깔 시카고강 물결도 봐야 하고…
“매일 아침 달리기도 할거야”
여기서 갑자기 달리기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시카고에서 해보고 싶은 리스트를 나열하는 동안 남편이 원하는 항목은 딱 한 가지였다. 달리기! 이제 달리기도 알아봐야 한다.
시카고 동쪽엔 마치 바다처럼 넓은 호수인 미시간호가 자리 잡고 있다. 미시간호의 넓이가 대한민국의 절반 가량된다고 하니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시카고 역시 미시간호에 인접한 여러 도시 중 한 곳일 뿐이다. 남편은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 이 엄청난 미시간호를 따라 매일 아침 달릴 마음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나가 뛸 수 있을 정도로 호수변에 인접한 호텔 예약이었다. 문제는 미시간호에 인접해 있는 동쪽은 시카고 도심이어서 호텔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당시 환율은 1400원을 뚫어버릴 듯 치솟고 있고(지금은 1400원을 우습게 넘겼다.) 미국 물가는 늘 나를 겁나게 하는데 비싼 호텔을 잡아야 하다니.
“혹시 도시 외곽에 있는 에어비앤비 주변에서 조깅하면 안될까?”
그나마 숙박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인 에어비앤비를 점찍어 둔 상태여서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너의 반응을 예상했다는듯 본인이 찾은 호텔을 제시했다.
걸어서 1분 거리에 그랜트 공원과 버킹엄 분수가 있고, 또 거기서 1분 더 걸으면 미시간호를 따라 뛸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숙박비는 1박에 20만원 가량으로 시카고 기준 상당히 낮은 가격이었다.
물론 호텔이 너무 오래돼 밤이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고 때때로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고 구글 평점이 아주 낮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이밖에 런닝화, 무릎보호대, 런닝벨트 등 준비용품을 여행짐에 차곡 차곡 넣었다. 이렇게 미시간호를 따라 달릴 준비를 모두 마쳤다.
아침 7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그런지 새벽녘의 서늘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에 내려 앉아 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뒤,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분수인 버킹엄 분수쪽으로 한 걸음씩 옮겼다.
한낮의 버킹엄 분수는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새벽의 버킹엄 분수는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행객이 빠져 나간 관광지는 언뜻 외로워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그 자체의 웅장함이 꾸밈 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럽식 램프 가로등의 주황 불빛을 따라 계속 길을 걸었다. 거대한 미시간호 수면 위로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길 끝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큰 램프가 이제 막 불을 켜고 호수와 도시를 금빛으로, 오렌지빛으로,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듯 보였다.
아침 일찍 달리러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벅찬 순간을 만날 수 있었을까.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몰래 엿본 뒤, 비밀을 품에 안고 이제 달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달리기의 가장 큰 장점은 내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뒤로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간단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느 때보다 더 다양한 생각에 빠져든다.
때로는 머릿속에서 추억의 한 장소로 빠져 들기도 하고 언젠가 읽고 까먹었던 책의 한 구절을 갑자기 떠올리기도 한다. 요즘은 달리면서 써보고 싶은 문장들을 머릿 속으로 적었다가 지웠다가 다시 끄적인다.
단지 달리고 있을 뿐인데 내 안에선 또 다른 세계를 탐험하거나 새로 창조해낼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미시간호를 따라 달릴 때도 나는 호숫가의 바람을 맞으며 이 바람이 불어 오는 저 끝자락에 있을 이름 모를 사람을 상상해봤고, 표현하기 어려운 이 감정을 언어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뒤뚱 뒤뚱 걸으며 내 앞을 막는 거위떼를 보고 푸핫 크게 웃기도 했다.
그렇게 5킬로미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를 달리고 나니 이 도시가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달리고 난 다음엔 호텔로 돌아가 씻은 뒤 그날의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 준비는 간단하다. 편안한 옷과 오래 걸을 수 있는 운동화.
시카고는 걷기 좋은 도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걸으면 걸을수록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는 도시다.
도시 건축물 하나 하나가 매력은 물론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여행이 된다.
가령 초고층 빌딩 사이에 뜬금없이 서있는 고딕 양식의 작은 건물은 ‘워터타워(Water Tower)’로, 알고보니 1871년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시카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또 시카고강변에 있는 옥수수 모양의 빌딩 ‘마리나 시티 타워(Marina City Tower)’는 1968년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임대 아파트로 파격적인 디자인과 효율성까지 갖춘 건축물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안볼 수 없는 거대한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 타워(Trump International Hotel & Tower)’는 건물 표면에 시카고의 낮과 밤의 색깔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나타난다.
시카고 거리의 매력은 건축물뿐만이 아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피카소, 샤갈, 미로 등 예술 거장들의 조형 작품이 보물처럼 나타난다.
길을 가다 피카소의 공공 설치 미술품을 발견했을 때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끌렸지만 이 조형물 주변에서 플리마켓을 열고 채소, 꽃, 과일을 파는 시카고 시민들의 생활이 더 인상적이었다. 피카소라는 거장의 이름에 압도되지 않고 일상의 삶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다니.
피카소 작품과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호안 미로의 공공 조형물도 마찬가지였다. 조형물 바로 뒷편에서 한 배달 기사가 자전거를 세워 놓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나저나 시카고의 매력에 푹 빠져 한참을 걷다 보니 날이 저물기 전인데도 2만 3천보나 걸어버렸다.
큰일이다. 시카고를 생각하기 전에 다음날의 내 다리부터 걱정해야 한다. 내일도 여행의 시작은 달리기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