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위스키와 친해지기

루이빌, 켄터키주 & 내슈빌, 테네시주

by 고라니

내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던 순간은 20살 대학 새터에서였다. 한 방에 빙 둘러 앉아 걸린 사람이 술을 원샷 하는 게임을 했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당연히 반복적으로 걸렸고 처음엔 소주, 나중에는 소주에 뭘 섞었는지도 알 수 없는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켰다.


술을 마실 때마다 신이 나서 박수를 연신 치던 선배들은 내가 또 게임에서 걸리자 슬슬 이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한 선배가 자신이 대신 마신다며 내 잔쪽으로 손을 뻗었고 나는 그 손을 탁 쳐낸 뒤 말했다.

“이거 제 술이에요”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낸 덕분에 아빠가 마시던 술에 몇 번 입술을 대보는 것 이외엔 그 전까지 술을 제대로 마셔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모범생인 내가 대학 사회에선 애주가? 그날 나는 취하지도 않고 새터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됐다.


그 후 지금까지 00년 동안 착실한 술꾼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학 때는 수업을 빼먹고 잔디밭에서 짜장면에 속칭 빼갈(고량주)을 들이켰고 친구 중 누군가 아르바이트비를 받을 때마다 우르르 달려가 소주를 사먹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회사와 집이 멀다는 핑계로 홍대에 자취방을 얻어 소맥, 막걸리, 와인 가리지 않고 마셨다.


술 덕분에 얼마나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고 즐거운 순간을 보냈는지.

술 때문에 아침마다 얼마나 짙은 숙취에 시달렸는지.

생각해보면 애증의 관계지만 다음날 숙취로 몸부림칠걸 알면서도 오늘의 술자리를 선택하는건 결국 나니까. 무게추가 ‘증’보다는 ‘애’에 훨씬 기울어진 관계다.


tempImage2H5bPr.heic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에반 윌리엄스 본고장 루이빌에 가서 복숭아맛 리큐르를 샀다.

이렇게나 술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나지만, 아직까지 서먹한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 술이 있다.

바로 위스키. 위스키는 일단 비싸다. 비싸다보니 대하기 조심스럽다. 잔이 넘칠새라 콸콸 따라서 벌컥 벌컥 마시는 소주, 막걸리와 달리, 한 방울이라도 놓칠새라 고급 잔에 조심스럽게 따라 조신하게 마셔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위스키는 외롭다. 모든 술은 잔을 부딪히는 행위를 통해 상대방과 내가 이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하지만 나에게 위스키는 홀로 앉아 얼음과 술을 넣은 잔을 손으로 빙글 빙글 돌리며 사색에 잠기는 이미지다.


딱 한 번, 위스키가 궁금해진 적이 있긴 하다. 영화 '소공녀'에서 배우 이솜이 연기한 주인공 미소는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모금, 그리고 남자친구(배우 안재홍이 연기했다.)가 삶의 전부다. 하지만 점점 팍팍해지는 살림살이에 미소는 과감히 집을 포기하고 위스키 한 잔을 지킨다. 도대체 왜?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미소가 바에서 위스키 한 모금을 소중하게 입 안으로 삼키며 음미하는 모습만은 잊을 수 없다. 이 때 처음으로 위스키가 살짝 궁금해지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술과 달리 위스키와는 아직 친해지지 못했다. 모두가 친한 무리에서 딱 한 명하고만 어색한 사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tempImagew1I4H5.heic 켄터키주 루이빌에 위치한 에발 윌리엄스 위스키 체험장. 버번 위스키 자존감이 엄청나다고 한다.

위스키, 친해지길 바래


미국 루이빌과 내슈빌 여행을 위스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출발점으로 삼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여행 전, 두 지역의 위스키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미리 알아봤다.


루이빌이 속한 켄터키주와 내슈빌이 포함된 테네시주는 미국에서 위스키 주도권을 가지고 치열하게 다투는 곳들이다.

켄터키의 위스키는 51% 이상의 옥수수를 주 원료로 한 버번 위스키다. 전세계에 팔리는 버번 위스키 대부분이 켄터키주에서 생산되며 이 곳에 근간을 둔 브랜드 ‘에반 윌리엄스’는 전세계 버번 위스키 판매량 2위를 자랑한다.


테네시주 역시 사실상 버번 위스키를 만들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버번 대신 ‘테네시 위스키’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한다. 테네시 위스키는 버번 위스키 제조 중 단풍나무 숯으로 필터링을 하는 과정을 추가해 차별화했다고 한다. 가장 인기 있는 위스키로 꼽히는 잭 다니엘이 바로 테네시 위스키다.


두 주가 위스키 생산에 있어 자존심 경쟁을 펼친 것과 별개로, 미국의 위스키 산업은 두 차례의 타격을 입은 역사가 있다.

독립전쟁 후 위스키에 일종의 ‘사치세’ 명목의 막대한 소비세를 부과했던 1790년대가 첫 번째 위기였다. 당시의 과세는 청원운동과 세금 납부 거부, 나아가 반란으로까지 이어졌다.


두 번째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1930년대 시행된 금주법이다. 이로 인해 일부는 의료용 위스키 제조 허가를 받아 명맥을 이어갔고 또 미국 곳곳에서 누군가는 밤 늦은 시간 달빛 아래 몰래 만든 위스키 ‘문샤인’을 탄생시켰다.

나에겐 엄숙하고 짐짓 젠체하는 이미지인 위스키가 사실 탄압과 치열한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벌써 한껏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tempImagewwuXK0.heic 2층에서 1층으로 쏟아져내리는 위스키 조형물은 단언컨데 인스타 각이다.

위스키 입문자라면, 루이빌 ‘에반 윌리엄스’로


켄터키를 버번 위스키의 중심으로 만든 인물은 ‘루이 윌리엄스’다. 1783년 켄터키에 상업용 증류소를 처음 지어 버번 위스키가 가내수공업에서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의 이름을 딴 에반 윌리엄스 브랜드는 위스키 초보들을 위한 입문 위스키로 유명하다. 초보들을 위한 위스키인 이유는 맛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가격이 저렴해서다. 초보자가 한 병에 십만원대를 훌쩍 넘는 위스키에 덜컥 도전하기엔 위험 부담이 클테니까.


한 가지 더, 에반 윌리엄스는 위스키를 마실 때 엄숙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소다수를 섞어 하이볼로 만들어 먹거나 콜라를 타서 누구나 위스키를 더 가볍고 경쾌하게 즐길 수 있도록 권한다. 저렴한데다 내 맘대로 섞어 먹을 수 있다니. 제멋대로 술꾼인 나에게 딱인 위스키다.


루이빌에 있는 에반 윌리엄스 체험장 분위기도 이 경쾌한 위스키와 비슷했다. 들어가자마자 사람 키보다 더 큰 거대한 잔에 위스키가 가득 담겨 흘러 넘치는 듯한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관계자가 다가와 “체험장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이 전시 정말 멋지죠? 마음껏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마음껏 구경하라니 시키는대로 건물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이 곳 역사도 읽어보고 위스키도 살펴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위스키 구매 욕구가 샘솟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산 위스키는? 위스키를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즐겨도 된다는 에반 윌리엄스의 방향에 맞춰 정통은 아니지만 '에반 윌리엄스 피치’를 구입했다.

왜 피치맛이냐고? 조지아주에서 1년살기를 하는 여행자가 조지아 복숭아가 가미된 켄터키 버번 위스키를 그냥 지나칠 순 없잖아.


tempImagemYQAzG.heic 증류소를 못가는 대신 아쉬운대로 방문한 '잭다니엘 제너럴 스토어'. 그래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365일 축제 도시 내슈빌에서 위스키를


에반 윌리엄스가 미국 버번 위스키의 시작이라면 잭다니엘은 미국 테네시 위스키의 상징같은 존재다.

내슈빌 인근에 위치한 잭다니엘 증류소 투어를 하고 싶었지만 술을 마신 뒤 다시 운전을 할 수 없어 도심에 있는 ‘잭다니엘 제너럴 스토어’에 방문했다. 다양한 위스키 종류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 곳은 티셔츠, 모자, 초콜렛, 커피 등 잭다니엘 브랜드 연관 상품을 파는 곳이었다.


tempImage8dOOa4.heic 나를 구원해준 '테네시 레전드 디스틸러리'. 시음은 무료지만 미국인 만큼 바텐더에게 팁을 주는 것이 매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건물을 헤매던 중 각종 술이 벽 전체에 가득 진열된 상점을 발견했다. 이름도 무려 ‘테네시 레전드 디스틸러리(Tennessee Legend Distillery)’!

위스키, 문샤인, 럼, 리큐르 등 여러 종류의 술이 표시돼있는 메뉴판을 보고 원하는 술 메뉴 위에 잔을 올려두면 총 5잔의 시음을 무료로 제공한다. 술 중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공짜술인 만큼 얼른 들어가서 헬로우를 외쳤다.


고심 끝에 내가 고른 술은 위스키 3종, 레모네이드 맛 문샤인 1종, 코코넛맛 럼 1종이었다. 시음인 만큼 컵 크기는 작았지만 바텐더는 컵 바깥까지 넘칠 정도로 한 가득씩 술을 따라줬다. 바 테이블에 서서 남편과 살짝 잔을 맞부딪힌 뒤 한 입에 털어넣는 위스키의 맛이란!


내가 서 있던 바 테이블 양 옆에서도 위스키 시음을 하는 여행자들이 있었다. 다들 신이 나 어떤 술이 가장 마음에 드는지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고 나도 덩달아 잔뜩 흥이 올라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이 작은 위스키 한 잔이 우리의 여행을 이렇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거구나.


tempImageL135g1.heic 컨트리 음악 자체가 백인들의 문화여서 그런지 인종 구성이 전부 백인이었다는 점만 빼면, 화려함에 반하고 흥에 취한다.


이날 저녁은 내슈빌의 홍키통크(Honky Tonk) 거리에서 길 전체에 울려퍼지는 컨트리 음악을 들으며 저녁을 먹고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슈빌은 컨트리 음악의 도시인 만큼, 365일 홍키통크 거리 전체에 있는 펍과 바에서 라이브 공연을 한다.


미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흐르는 음악과 손에 들린 위스키를, 맥주를, 칵테일을 즐긴다. 위스키가 이렇게 재밌는거였어? 이제 우리 친해질 때가 됐다.

keyword
이전 04화여행의 시작은 달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