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New Orleans), 루이지애나주
여행은 고단함과 긴장의 연속이다. 뉴올리언스 여행 당일, 새벽 5시에 눈을 떠 도시락과 간식을 싸고 여행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11월 말 겨울 초입의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동이 트기 전 어둠 속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오해의 소지가 없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장롱면허이고 운전은 늘 남편이 한다.) 미국에 3개월 조금 넘게 지내면서 매일 운전을 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색한 나라, 익숙하지 않은 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면 잔뜩 긴장을 한다.
덩달아 조수석에 앉은 나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급하게 들어오는 차는 없는지, 갓길에 숨어서 나타나는 경찰차는 없는지 사방을 훑으며 함께 경계 태세에 돌입한다.(그나저나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미국에선 양보운전, 안전운전이 기본이라고 하던데 왜 내가 겪은 미국 운전자들은 전부 과속을 즐기는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조지아주 에선스에서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까지 꼬박 9시간 30분을 차로 이동했다.
긴장의 시간이 끝나고 호텔에 짐을 푼 뒤 미리 예약해뒀던 ‘사제락 하우스(The Sazerac House)’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코냑이나 라이위스키로 만드는 사제락 칵테일은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술이다.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벤자민이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우연히 만나 함께 마셨던 술이 바로 사제락이다. 영화 속에서 벤자민의 아버지는 벤자민이 (외모는 할아버지였지만) 아직 아이였을 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함께 사제락을 마신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 이제는 다 자라 청년의 모습이 된 벤자민을 만났을 때도 사제락을 마실 정도로 이 술을 아끼는 인물이다.
사제락 하우스에서 방문객들은 이 곳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직접 살펴볼 수 있고 각기 다른 맛의 칵테일 3잔을 무료로 맛볼 수도 있다. 자칭 타칭 애주가들은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장소라는 의미다.
입구에 들어가서 예약자명을 말하고 방문객 팔찌를 차고 나니 은발의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방문객들에게 사전에 주의할 점 등을 안내해주는 가이드였다.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니 예전에 서울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정확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녀는 건물 2~3층을 자유롭게 둘러보다가 중간 중간 마련된 작은 바에서 칵테일을 시음하면 된다고 알려줬다.
구경하기, 그리고 술마시기 둘 다 내가 자신있는 영역이다. 구경은 건너뛰고 술로 넘어가보자면, 첫 번째 잔은 커피와 카라멜 향이 났고 두 번째 잔은 과일맛이 가득했으며 세 번째 잔은 시트러스 느낌이 났다.
세 잔 모두 도수는 높았지만 달콤했다. 뉴올리언스 여행 시작부터 달달하다.
여행의 달달함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다음날 오전, 남부 지방의 따스한 기운을 반영해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섰지만 하필 이 날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져버렸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차가운 공기, 이상하게 습도까지 높아서 바람 한 줄기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얼굴에 쩍쩍 달라붙었다. 하루 전 햇볕 가득하고 따뜻한 날씨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건지 참나. 맑고 차가운 추위보다는 스산하게 뼛속에 스며드는 추위였다.
감기는 이럴 때 걸리는 법이다. 방심하고 미처 대비를 못했는데 찬 기운이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오늘같은 순간에 말이다.
일단 밖으로 나왔으니 트램을 타고 시티파크로 이동했다. 시티파크는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더 큰 규모의 도심 공원이다. 내부에는 현대 미술관과 조각공원, 호수, 수백년 된 오크 나무 등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천천히 산책하며 둘러보는 계획이었지만 추위로 인해 조각공원만 빠르게 둘러보고 다시 트램에 올랐다. 이후 미시시피강을 가로지르는 페리까지 타고 나니 강바람 때문인지 감기가 목 안에서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따뜻한 음식으로 감기를 눌러줘야만 한다.
뉴올리언스의 중심인 프렌치 쿼터 지역에서 꽤 유명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큰 고민 없이 이 지역의 소울푸드, 잠발라야(Jambalaya)와 레드빈 라이스(Red bean & Rice)를 주문했다. 잠발라야는 고기나 해산물을 넣은 볶음밥과 비슷하고 레드빈 라이스는 통팥이 살아있는 팥죽 맛과 비슷하다.
둘 다 맛있었지만 특히 레드빈 라이스의 맛이 인상적이었다. 따뜻한 팥죽 한 그릇 덕에 겨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힘이 생기는 것처럼, 레드빈 라이스를 먹고 나니 추위를 맞이할 준비가 끝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구름 잔뜩 낀 하늘, 스산한 날씨, 내 얼굴을 때리는 바람은 이 완벽한 한 그릇의 식사를 위한 조미료였던 것이다.
문제는 식사를 끝마친 이후 벌어졌다. 슬슬 계산을 하려는데 도통 자리로 담당 서버가 올 생각이 없었다. 사실 밥을 먹는 중에도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다.
앞자리, 뒷자리 손님들에겐 음식이 어떤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식사 중간 중간 물었지만 그 때마다 우리 테이블쪽은 투명인간인듯 지나쳐 버렸다. 다른 테이블의 경우 계산을 해야 할 때 즈음 알아서 서버가 카드 결제기를 들고 다가와 친절하게 응대를 했지만 우리 테이블로는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싸움?을 한 끝에 테이블로 온 서버는 결제를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카드 결제기만 자리에 두고 그냥 떠나버렸다. 그는 끝까지 테이블로 오지 않았고 우리가 알아서 결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슬쩍 다가와 카드 결제기만 챙겨 가버렸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까지 인사 한 마디 없었다. 주문을 받지 않는 인종차별 사례는 자주 들어봤는데 결제를 받지 않는 경우는 처음 들어봤고 처음 경험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니 까짓게 내 여행 기분을 망칠 수 없지” 라고 혼자 생각하며 잊으려 해도 그 짧은 경험은 여행에 옅은 얼룩을 남겼다.
이후엔 뉴올리언스의 중심인 프렌치 쿼터에 가서 세인트루이스 대성당과 잭슨 스퀘어를 둘러봐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구름 잔뜩 낀 날씨 아래 뉴올리언스 여행의 맛은 떫은 감을 입 안 가득 넣은 것 처럼 그저 텁텁했다.
잭슨 스퀘어를 가로 질러 바깥으로 나오자 여행 전 몇 번이나 찾아봐 익숙한 초록 천막이 눈 앞에 보였다. 카페 드 몽드(Cafe Du Monde)였다. 이 곳은 슈가파우더를 잔뜩 쌓아올린(뿌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도너츠, 베녜로 유명한 카페다.
개인적으로 음식 영화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아메리칸 셰프’에서도 이 곳이 나온다. 주인공인 셰프 칼은 아들에게 카페 드 몽드의 베녜를 맛보게 하기 위해 뉴올리언스에 푸드트럭을 세운다.
“천천히 먹어. 생애 첫 베녜는 다신 못 먹어. 세계 어디에서도 이 맛은 못 내”
푸드트럭 영업을 위한 식재료는 안 사냐는 아들의 질문에 주인공은 “너랑 베녜 먹으러 온 거야” 라고 답한다. 아들은 슬쩍 미소 지으며 “나 뉴올리언스 좋아”라고 말하고 주인공도 “나도 뉴올리언스 좋아” 화답한다.
눈 앞에 아메리칸 셰프의 한 장면이 펼쳐져 있는데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가득찬 인파 속에서 겨우 한 자리를 찾아 베녜와 카페오레를 주문했다. 잠시 뒤 새하얀 슈가파우더로 뒤덮인 접시가 나왔고 그 아래엔 베녜가 깔려 있었다.
행여나 슈가파우더를 떨어뜨릴까 조심히 베녜 하나를 들어 한 입 크게 베어 무니 따뜻하고 달콤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베녜를 다 삼키기 전에 어서 카페오레도 한 모금 들이켰다. 입 안에서 베녜와 카페오레가 어우러져 더 따뜻해졌고 더 부드러워졌다.
어쩌면 겨우 한 입. 이 한 입이 뉴올리언스 여행을 인식하는 기준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메리칸 셰프의 부자처럼 나도 뉴올리언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베녜를 먹고 프렌치쿼터 중심으로 다시 이동하자 거짓말처럼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다. 불과 1시간 전 인파만 가득했던 회색빛의 광장이 이제는 재즈가 울려퍼지는 따뜻한 느낌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
트럼펫과 색소폰, 드럼을 든 연주자들의 라이브 재즈 공연에 맞춰 구경을 하던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한참 동안 신나게 공연을 즐기다가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재즈 연주가 한창이었다. 그 옆에선 길을 걷던 아빠와 딸이 발걸음을 멈추고 대신 발을 구르며 춤을 췄다.
뉴올리언스가 아메리칸 셰프의 부자에게 인생 첫 베녜를 선물한 것처럼 이 부녀에게도 거리에서 함께 춤을 춘 기억을 안겨줬을 것이다. 골목 곳곳마다 각기 다른 재즈 연주자들을 마주치는 우연의 순간만큼 신나는 우연이 또 있을까.
재즈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저녁을 먹으러 굴 전문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뉴올리언스는 항구 도시인 만큼 굴 요리가 유명하다. 바 자리에 앉아 생굴 반 판(Half Dozen)과 굴구이 반 판을 주문했다.
바로 앞에서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중년의 점원이 실시간으로 손바닥만한 석화를 반으로 갈라 얼음 가득한 접시 위에 턱턱 얹어줬다. 과장 조금 보태 굴 하나가 아기 주먹만한 크기였다. 큼지막한 굴을 껍질채로 집어 들어 레몬즙을 뿌리고 소스 살짝 얹어 호로록 들이마시니 입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굴 국밥, 굴전, 매생이 굴 떡국, 굴 김치, 굴 구이까지 수많은 굴 요리를 먹어왔지만 뉴올리언스의 생굴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풍미 가득하면서도 비리지 않고 산뜻하면서도 맛이 깊다. 반 판만 주문한건 역시 큰 잘못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굴 맛에 푹 빠져 있는 찰나, 갑자기 접시 위에 새로운 굴들이 한 무더기 올라왔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굴만 가르던 점원 아저씨가 무려 5개의 손바닥만한 굴을 더 얹어준 것이다. 분명 생굴 반 판을 주문했는데 최종적으로는 한 판을 양껏 먹을 수 있게 됐다.
그 순간 나는 봤다. 굴을 먹으며 행복해 어쩔줄 몰라하던 내 표정을 본 점원 아저씨가 슬쩍 미소를 짓는 모습을. 결제를 하고 나갈 때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자 이번엔 활짝 웃어주었다. 내가 이 도시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여행은 고단함과 긴장의 연속이다. 하지만 인생 첫 베녜, 거리의 재즈, 굴 한 판의 순간들이 고단함과 긴장을 뚫고 여행을 무엇보다 반짝거리게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