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Orlando), 플로리다주
내가 이 곳에 오다니. 한국에서 에버랜드조차 가보지 못한 내가 미국 올랜도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오다니!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상징, 빙글 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지구본이 눈 앞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현실에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란 무엇인가. 꿈과 희망의 세계, 마법의 세계, 판타지의 세계, 그리고 등골브레이커의 세계. 사실 디즈니랜드에 갈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갈지 계속 고민했다. 둘 다 가기엔 자금과 체력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남편과 한 가지만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은 만장일치 유니버설 스튜디오.
이유는 사실 간단하고 명쾌하다. 일단 디즈니랜드는 너무 비싸다. 올랜도 디즈니랜드는 최소 4일 정도 머무는걸 추천하는데 시기별로 가격이 다르지만 최소 인당 70만원 이상 든다. 여기에 각 파크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는 옵션, 놀이기구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 빨리 탈 수 있는 옵션 등을 추가하면 금액이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미국 금융 플랫폼 너트월렛 조사에 따르면 4인 가족이 일주일 일정으로 디즈니랜드에 다녀오려면 6463달러~1만 5559달러(약 920만~2224만원)가 든다고 한다. 심지어 이건 항공권과 기념품을 뺀 금액이다. 미국 부모들이 왜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는지 절실히 이해되더라.
아, 물론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비싼건 매한가지지만 보통 이틀 정도 둘러보기 때문에 전체 비용은 디즈니보다 적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부부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1순위 캐릭터, 해리포터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캐릭터 모아나가 마지막까지 눈에 밟히긴 했지만 호그와트성과 다이애건 앨리, 9와 3/4 승강장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나름의 고민 끝에 도착한 올랜도 유니버설 스튜디오. 티켓을 보여주고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 마자 예상대로 꿈과 희망의 세계가 펼쳐지...기 전에 가장 인기 많은 놀이기구인 ‘해그리드 매지컬 크리처스 모터바이크 어드벤처(Hagrid’s Magical Creatures Motorbike Adventure)’를 타러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높은 인기 탓에 방문객들이 일단 입장하자마자 여기로 돌격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오전 7시 30분 이른 시간부터 입장한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모두 해그리드 모터바이크 한 곳을 향해 경쟁하듯 걸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놀이기구까지 간 뒤, 약 50분간의 지루한 대기시간까지 거쳐 드디어 해그리드 모터바이크에 탑승하고나서야 깨달았다.
‘또 타고 싶다. 더 오래 기다려서라도 타고 싶다.’
이 놀이기구는 해그리드의 오토바이를 타고 금지된 숲으로 들어가 신비한 동물들을 만나는 컨셉으로 진행된다. 해그리드의 설명에 맞춰 롤러코스터가 움직이기 때문에 중간에 케르베로스 ‘플러피’를 마주칠 때는 잠깐 느려지고 해그리드가 마법 실수를 할 때는 갑자기 오토바이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해리포터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고 또 보고 요즘은 오디오북까지 듣고 있는 팬의 입장에서 마법 세계의 구성원이 되는 판타지를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다른 놀이기구도 마찬가지였다. ‘해리포터 앤 더 포비든 저니(Harry Potter and the Forbidden Journey)’는 해리와 함께 호그와트성, 그리고 퀴디치 경기장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만든다. 디멘터를 물리친 뒤 덤블도어 교수와 학생들의 박수를 받을 때는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손을 힘껏 흔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놀이기구에서 내릴 때에도 해리포터 세계관은 끝나지 않는다. 도착한 뒤 안전장치가 풀리는 순간에 맞춰 직원들이 탑승객 한 명 한 명에게 자물쇠를 여는 “알로하모라 (Alohomore)” 주문을 건다. 단순히 해리포터 놀이기구를 타는 것을 넘어서 해리포터 마법의 세계 안에 속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섬세하게 설계돼있었다.
해리포터 속 마법의 세계 경험은 호그와트 열차와 다이애건 앨리에서 극대화된다. 호그와트 열차를 탈 수 있는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역은 해리포터 속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심지어 탑승객이 열차를 타러 9와 3/4 승강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거울에 스르르 모습이 사라지는 연출까지 구현해냈다.
호그와트 열차를 탄 뒤에는 객실 창가쪽 스크린으로 마법의 세계부터 런던까지 이어지는 풍경이 흐른다. 복도쪽에는 해리와 해르미온느, 론의 그림자가 때때로 나타나며 서로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근 소근 대화한다.
책은 해리포터 세계관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줬고 영화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끌어올렸다.
열차에서 내려서 다이애건 앨리로 들어가는 순간, 또 다른 해리포터 영화 속 장면이 펼쳐진다. 그린고트 은행 지붕 위에는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이 함께 타고 날았던 용 한 마리가 날아오를 듯 자리 잡고 있었다. 용이 그르렁 거리기 시작하면 불을 뿜을 순간이 왔다는 신호다. 용 입 안에서 순식간에 불 한 덩이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다이애건 앨리 곳곳에 뜨거운 기운이 훅 퍼진다.
골목 곳곳엔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볼 수 있는 지점들도 있다. 호그와트 망토를 두른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지팡이를 허공에 부드럽게 돌리며 주문을 외치면 물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 상점 안에 있는 전시품이 움직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탄성을 내지르고 누군가는 박수를 치고 또 누군가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되어 거리를 누볐다.
설사 이 모든 것이 고도로 잘 짜여진 연출이라는 것을 인식하더라도 뭐 상관없지 않을까. 판타지 속에 풍덩 빠지고 싶어서 다들 여기까지 왔을테니까.
해리포터뿐 아니라 다른 파크도 단순히 놀이기구의 재미를 넘어 방문객들이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영화 ‘분노의 질주’ 놀이기구에선 내부를 이동하는 동안 각 무대에 배우들이 직접 연기를 하며 영화 속 상황을 연출했다. 스파이더맨 놀이기구는 탑승객들이 스파이더맨과 함께 뉴욕을 누비며 다양한 영화 속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컨셉으로 진행됐다.
모두가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판타지에 녹아들고 반짝거리는 상상을 하는 곳,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그런 곳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물론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디즈니랜드를 방문하는데 필요한 금액을 생각하면 진짜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되긴 힘들다.) 누군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판타지 덕분에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을지 모른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곳곳이 감탄의 연속이었지만 사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휠체어를 타고 행복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휠체어나 혹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제공하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누비는 사람들과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각자의 판타지를 즐기고 있었다.
이 곳에서 내가 본 모습은 전동 휠체어를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민 채 기념품을 고르는 커플, 휠체어에 탄 채로 무릎 위에 손녀를 앉히고 함께 기념 촬영을 하는 할아버지와 가족들, 휠체어에 앉아서 해리포터 망토를 입고 마법지팡이를 휘두르는 아이였다.
한국의 놀이공원에서 장애인 이용자를 본 적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 드림랜드부터 가장 최근에 간 롯데월드까지 쭉 머릿속으로 훑어봐도 없었다. 단 한 명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한국에선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비장애인만 가득한 놀이공원(놀이공원뿐 아니라 대중교통, 길거리 어디서나)이 ‘정상’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일단 긴 대기줄에 있기 힘든 장애인 이용자와 동행자는 무료로 우선 탑승을 시켜준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우선 탑승권은 하루에 인당 50만원 전후에 달할 정도로 비싸지만 이 비용을 낸 누구도 장애인의 우선 탑승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휠체어를 탄 이용자에겐 휠체어를 탄 채로 놀이기구 탑승이 가능한지, 아니면 내려서 탑승해야 하는지 등 세부 안내도 해준다. 한국에서라면 안내 대신 금지를 써 붙이지 않았을까?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장애인 이용자가 놀이공원에 올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아 금지 안내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공간에서 같은 판타지를 즐기는 것. 이것이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보여준 진짜 ‘정상’ 상태다.
물폭탄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탈까 말까 고민하다 들어갔던 ‘쥬라기 공원 리버 어드벤처’ 놀이기구. 영화 속 쥬라기 공원을 보트를 타고 탐험하는 컨셉의 놀이기구다.
한 줄에 4명씩 앉아야 하는데 내 옆에 거동이 불편한 A가 있었다. 휠체어에서 일어나서 보트에 앉을 때까지 A는 함께 온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발을 옮겼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보고 이 놀이기구 너무 기대된다며 들뜬 마음을 내뱉었다. 나는 물폭탄이 걱정된다고 답했고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물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움직이는 공룡 모형을 보는 것은 잔잔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이제 마지막 순간, A는 나에게 “지금이야!”라고 알려줬고 덕분에 바람막이 모자를 급하게 뒤집어 써서 물을 그나마 덜 맞을 수 있었다. 한참을 깔깔대다 조심스럽게 내가 혹시 내릴 때 도와줘도 되는지 물어보자 너무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A의 친구가 휠체어를 꺼내는 동안 A가 천천히 보트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나와 남편이 양 옆에서 부축을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행복한 하루를 보내라고, 행복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라고 인사했다.
나는 A가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특히 한국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판타지를 듬뿍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수많은 다른 A들이 걱정 없이 휠체어를 끌고 놀이공원에서 하루의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 모두에겐 판타지가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