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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찾는 즐거움

서배너(Savannah), 조지아주

by 고라니

어린 시절 매주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이른 아침 방영한 ‘디즈니 만화동산’이다. 디즈니 만화동산 덕분에 학교에 가야 하는 평일보다 오히려 주말에 더 일찍 잠에서 깼다. 온 집중을 다해 만화를 본 뒤엔 동생과 함께 마을버스를 타고 약 2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득한 책들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 두 번째 이유였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스라지지 않은 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내겐 주말마다 반나절을 보낸 도서관에서의 하루 하루가 그렇다. 도서관에 입장하면 동생과 서로 맞잡은 손을 놓고 각자의 공간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동생은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찾아 읽은 뒤 다음 책을 찾는 스타일이었고, 나는 오늘 읽을 책 여러 권을 한 번에 천천히 고르는 스타일이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며 표지 감촉을 느끼는 순간도 좋았고 책 한 권을 꺼내 빠르게 훑으며 먼저 읽은 누군가가 밑줄 그어 놓은 부분(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도서관 책 밑줄긋기처럼 금지된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어린이였다.)을 찾는 것도 재밌었다.


한참동안 고심해서 고른 책들을 두 팔 가득 안아 들고난 뒤엔 꼼짝도 하지 않고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내게는 동네 도서관이 놀이동산이었고 책을 찾아 읽는 과정은 회전목마이자 롤러코스터였다.


나만의 놀이동산은 대학에 들어간 뒤엔 학교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엔 학교 중앙도서관 이외에 학생들 자체적으로 운영되던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학생회관 한 켠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작디 작은 도서관. 이용하던 이가 많지 않아 도서관 전체가 나만을 위해 존재하듯 혼자 서가 곳곳을 탐험하며 돌아다녔던 도서관. 수업 사이 시간이 비거나 수업이 다 끝나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 책을 찾고 또 찾았다.


이 곳에서 움베르트 에코를 처음 알게된 순간도 기억나고 올리브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책 제목을 발견하고 ‘오늘은 이 책이다!’ 라고 생각했던 순간도 기억난다. 때로는 막상 읽어보니 책 내용이 멋진 표지에 미치지 못했던 적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책을 고르는 과정은 시공간을 넘어 글쓴이와 상호작용했던 순간일뿐 아니라 그날의 공간과 감정, 경험을 반영한 행위였다.


tempImageoEibzD.heic 솔직히 말하자면, 고양이를 발견했을 때 가장 기쁘긴 했다.

독립서점을 찾는 즐거움


서배너는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다. 조지아주 최초의 도시이며 남북전쟁 격전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1830년대 저택을 개조한 호텔에서의 경험도 신기했고 거리를 걸으며 1800년대 미국 도시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현재의 서배너를 가장 서배너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보물 찾기하든 곳곳에 나타나는 독립서점이다.


처음 찾은 보물은 ‘E. SHAVER, bookseller’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진열장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마다 어떤 내용인지, 왜 추천하는지 등 사심 가득 담아 적은 종이가 빼꼼히 끼워져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작은 미로처럼 짧은 복도와 중간 중간 새로운 방이 나왔다. 어떤 방엔 소파 위에서 꾸벅 잠에 들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다른 방엔 타자기 한 대와 방문객들이 타자기로 꾹꾹 써넣은 글귀들이 벽 한 가득 붙어 있었다. 창문엔 ‘We sell banned books(금지된 서적도 팝니다)’라 쓰인 포스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서점은 ’The Book Lady Bookstore’였다. 지표면에서 반 칸 아래로 내려들어가니 이전 책방과는 또 다른 느낌의 공간이 눈 앞에 나타났다. 천장에 달려 있던 ‘Love Your Local’ 푯말의 의미답게 미국 남부 역사(Southern History) 서적 코너가 따로 있었고 남부 지역의 오래된 독립 출판물 모음도 마련돼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Books on Bay’는 건물 밖엔 반려견을 위한 간식이, 내부엔 방문객들을 위한 초콜렛이 마련돼있어 친근감이 부풀어올랐다. 서점을 찾은 이들에게 보인 호의만큼이나 서점은 밝고 따뜻하고 친절하다. 내부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오래되고 낡은 서적들이 곳곳에 비치돼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은 옛날 어린이 도서와 희귀 초판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tempImagejD8Wsw.heic 이 도시를 지키는 힘은 이런 작은 글귀에서 시작할 수도?

세 군데 독립서점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서로 다르다.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따라 서점의 분위기도, 책 구성도 달라진다. 이곳들을 포함해 서배너 곳곳에 있는 독립서점들의 독특함이 모여 서배너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서배너 여행을 다녀온 뒤 독립서점의 여운이 남아 검색해 본 기사에서 Books on Bay 서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독립서점들은 서로 약간 다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서배너라는 그림을 완성하려면 독립서점 각각이 필요합니다”


아, 독립서점들의 공통점도 있었다. 어떤 곳에 가더라도 책을 효율적으로 찾기 어렵다. 책은 서점 주인의 취향을 반영해 분류돼있고 위치를 쉽게 알려주는 구분 숫자도 없었다. 이로 인해 책장 사이를 탐험하며 몰랐던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한껏 커진다.


Books on Bay에서 한 여성 손님은 서점을 둘러보던 중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서점 주인에게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더니 “이 작가 들어보긴 했는데 책을 처음 읽어볼 수 있겠네요!”라며 웃었다. 불편함이 제공한 우연한 만남, 거기에 서점 주인과의 상호작용까지 겹쳐 책을 찾아낸 즐거움이 배가 됐을 것이다.


서배너에서의 독립서점 경험은 다른 도시 여행에서도 독립서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선 그 유명한 파웰서점(Powell’s Books)에 방문했고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선 시티 라이츠(City Lights Booksellers)를 찾아갔다. 두 서점 모두 지역의 정체성을 듬뿍 반영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시티 라이츠 서점은 기성 사회의 질서를 거부하고 대안적, 대항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한 1950년대 비트(Beat) 문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tempImageMZi7ym.heic 작은 도시 안에 공원이 정말 많다. 그래서 포레스트 검프로 서배너에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놨나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서배너


서배너는 참 이상한 도시다.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 자본주의에 충실한 미국에 위치하면서도 소위 돈이 되지 않는 독립서점들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본주의적으로 볼 땐 진작 아마존에 자리를 내어 줬어야만 한다.


서배너는 아름다운 도시다. 초록빛 물줄기처럼 아래로 드리워져 흩날리는 나무(서배너의 상징, 스패니쉬 모스라고 한다)들도 멋지고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인생 이야기를 흘려 놓는 공원도 반짝거린다.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앉았던 벤치는 이제 없지만 이 곳에 방문한 많은 팬들은 영화 속 명대사를 읊조린다.


"Life wa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에요.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무엇보다 나만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독립서점이라는 공간이 소중하다. 베스트셀러라는 정답을 읽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책을 찾으면서 나만의 가치, 취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과정은 얼마나 즐거운지. 하아. 이 즐거움을 도저히 글로도, 말로도 설명할 재주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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