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스톤 &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5월의 옐로스톤과 그랜드 티턴 여행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일단 등산화와 등산 스틱은 기본이고 먼 곳에 있는 야생동물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 숙소 내에서 햇반을 데워 먹을 수 있는 전기포트까지. 낮과 밤의 온도가 천차만별인 5월 옐로스톤에 대비해 옷은 반팔부터 패딩까지 4계절용을 다 챙겼다. 이것 저것 다 챙겨 넣고 나니 마지막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곰 스프레이.
남편은 국립공원 하이킹을 할 때 곰을 마주치면 위험하니 곰 스프레이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 곰 스프레이를 분사하면 캡사이신 성분이 곰의 후각을 자극해서 더 이상 곰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반대로 나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하이킹 코스에 곰이 나타날 가능성은 낮을 것 같으니 굳이 구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 모든 것을 너무 쉽게 버리도록 만드는 미국 생활에 안그래도 거북함을 느끼고 있는데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기껏 한 번 정도 사용하고 버려질 곰 스프레이는 괜히 불편했다.
여행 첫째날 그랜드 티턴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야 한다 안 사도 된다 옥신각신하다가 현지인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호스텔 직원 왈, “내가 너라면 곰 스프레이 없이 절대 하이킹 안 할거야.” 그리고 비지터 센터 안내인 왈, “이 사진을 봐. 지난주 내가 본 곰이야. 곰 스프레이 없이 걸으면 위험할 수 있어.”
논쟁의 승리자인 남편의 턱이 치켜올라가는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55달러나 주고 결국 곰 스프레이를 구입했다.(월마트 등에서 미리 구입하면 종류에 따라 10~40달러 가량이지만 끝까지 안 사고 버티던 나는 비지터 센터에서 가장 비싼 가격을 주고 살 수밖에 없었다.)
자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하이킹을 시작해 볼까.
그랜드 티턴은 로키 산맥의 일부로 장엄한 설산 풍경과 다양한 야생동물로 유명하다. 1950년대 고전 서부 영화 '셰인'에서도 만년설로 뒤덮인 산봉우리들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이외에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 분노의 추격자'의 촬영지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곳을 담은 영화처럼 나도 날 것의 대자연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인가.
그랜드 티턴에 들어가자 마자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제니 호수(Jenny Lake)였다. 트레일을 따라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수면에 반사된 설산 봉우리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길은 좁았지만 평탄한 편이었고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이렇게 꾸준히 사람들이 왔다 갔다 돌아다니는 길에 곰이 있을리 없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며 약 1시간 가량을 걸었다.
그 때 눈 앞에 우두커니 멈춰 있는 예닐곱명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같은 일행이 아니었는데도 시선이 동일한 곳에 머무른 채 안절 부절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몇 걸음 앞으로 더 내딛는 순간 발견한 것은 바로 곰이었다.
그래 곰이었다. 이전에 갔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도 곰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셔틀버스 내부에 있었고 곰은 빽빽한 나무와 수풀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을 걷고 있었고 곰도 같은 길을 걸으며 점차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멈춰 있었고 곰은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우리쪽으로 걸으며 거리를 점차 좁혀왔다.
국립공원에서 설명하는 곰과의 안전 거리는 100야드(약 91미터). 현재 곰과 나 사이의 거리는 고작 10~20미터 남짓.(사실 정확한 거리는 잘 모르겠지만 심리적 거리는 이미 내 코 앞이었다.) 직전까지만 해도 서로 누군지도 모르던 한국인과 미국인, 프랑스인 여럿은 서로 곰 스프레이가 있는지 체크한 뒤 일단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상대는 흑곰도 아니고 무려 회색곰(Grizzly Bear). 크기도 더 크고 상대적으로 포악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등을 보이고 뛰면 곰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평온하게 하이킹을 하듯 걸었다. 근처에 사람이 있다고 인식하면 곰이 먼저 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들 꾸준히 대화를 하고 박수를 치며 이동했다. (하지만 바로 정면에서 마주쳤기 때문에 이 곰은 이미 우리의 존재를 알고도 계속 다가왔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웃긴 풍경 아닌가. 국적도, 나이도 다른 사람들이 공포에 떨면서도 박수를 치며 일렬로 나아가는 상황이라니. 한참 동안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아직 곰이 쫓아오고, 다시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곰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 때 맨 뒤에서 걷던 남편이 갑자기 결심한 듯 그 자리에서 멈춰서 곰 스프레이를 꺼냈다. 그리고 곰이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땅바닥에 두 차례에 걸쳐서 분사했다. 다시 열심히 앞을 보고 걷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니 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곰 스프레이 덕분 이었을 수도 있고 그저 곰이 우리를 향한 관심이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남편은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십분 전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서 잰걸음을 했던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깨알같이 찍은 곰 사진과 영상을 서로 공유하며 깔깔 웃어댔다. 나는 콧대가 높아진 남편에게 곰 스프레이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 티턴과 옐로스톤은 원시의 자연을 감상하는 것 만큼이나 다양한 야생동물을 관찰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미 한 번 마주쳤던 그리즐리 곰을 포함해 바이슨, 코요테, 늑대, 여유, 엘크, 사슴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덕분에 그랜드 티턴에 도착한 날 곰을 만나며 하이킹을 했다면 떠나는 날에는 여우를 마주치는 행운을 누렸다. 금빛과 붉은 빛이 뒤섞인 털에 까만 다리를 가진 붉은 여우(Red Fox)는 자신 옆에 차가 서 있든 말든 알바 아니라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제 갈길을 걸었다. 차 안에서 숨 죽이며 망원경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도 여우의 걸음 걸음을 따라 이동했다.
그랜드 티턴을 지나 옐로스톤에 들어가니 이번엔 바이슨(Bison)이 나를 맞이했다. 바이슨은 옐로스톤에서 볼 수 있는 들소로, 북미에서 가장 거대한 육상 포유류다. 암컷은 약 500kg, 수컷은 무려 900kg에 육박한다.
처음엔 초원에 앉아있는 바이슨 한 마리를 보고 소녀팬처럼 폴짝 폴짝 뛰며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하지만 이 반응이 옐로스톤에선 얼마나 호들갑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불과 몇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알고보니 바이슨은 옐로스톤에서 가장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야생동물이었다. 약 4,000여 마리 정도가 서식하고 있어서 옐로스톤에서 풀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바이슨을 만나볼 수 있다.
실제로 3박 4일간 옐로스톤에 머물면서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는 바이슨 떼, 눈발을 맞으며 차로를 걷는 바이슨, 엄마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새끼 바이슨, 풀을 먹다 지쳐 드러누워 버린 바이슨 등 다양한 바이슨을 만났다. 하도 자주 마주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와 남편은 바이슨을 ‘또이슨’ 즉, 또 만난 바이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옐로스톤에서 야생동물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은 ‘라마 밸리(Ramar Valley)’다. 풀과 계곡물이 풍부해 다양한 동물들이 찾아오는데다 드넓고 평평한 지형이어서 멀리서도 이들을 관찰하기 적합하다.
특히 동이 트기 전 동물들의 움직임이 활발한 시기에 방문하면 다양한 동물뿐만 아니라 엄청난 대포 카메라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늑대와 같은 만나기 어려운 동물을 보는 한 가지 팁은 대포 카메라를 설치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전문가 느낌을 풍기는 할아버지들 옆에 서서 함께 기다리는 것이다. 곰이든 늑대든 자주 보기 힘든 야생동물이 나타나는 곳엔 반드시 그들이 있다.
라마 밸리에서의 가장 큰 수확은 코요테를 바로 앞에서 본 일이었다. 사실 코요테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교활함, 포악함, 비열함 등이었다. 부끄럽게도 코요테와 하이에나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이미지를 중첩시킨 탓이다.
하지만 실제로 본 코요테는 머릿속 이미지와 오히려 정반대였다. 검은빛과 은빛털이 조화롭게 뒤섞여 있었고 걸음걸이는 우아하고 신중했다. 주둥이는 날렵하고 눈빛은 차분했다. 이렇게 멋진 동물을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미지 따위로 교활하다고 생각하다니.(심지어 애니메이션에서 교활한 캐릭터로 나오는 동물은 코요테가 아니라 하이에나다.) 코요테의 땅에 잠깐 들어온 구경꾼 주제에 반성하자 인간.
이밖에 옐로스톤과 그랜드 티턴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종류의 동물과 조우했다. 햇빛을 쬐며 쉬고 있는 새하얀 펠리컨을 만났고 땅구덩이를 파고 있는 듯한 마멋도 봤다. 화이트테일 사슴이라든지 뮬 사슴이라든지 다양한 종류의 사슴들도 멀찍이서 관찰했다.
곰부터 사슴까지. 거대한 초원 속에서 날 것 그대로의 생명력을 뽐내는 동물들과 마주하고 나니 이 땅의 주인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히 느껴졌다. 자신의 주제를 깨닫는 경험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혹시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보다 대단한 존재라고 느껴진다면 꼭 한 번 가보자 옐로스톤과 그랜드티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