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 (Washington DC)
워싱턴 D.C.는 사실 관심이 통 가지 않던 도시였다. 미국의 수도, 뉴욕 여행을 할 때 당일치기로 주로 방문하는 곳, 캡틴 아메리카가 아침마다 런닝을 하던 장소 정도랄까. 어느 영화인가 시리즈물에서 전세계 첩보요원들이 집중돼있는 곳이라고 설명한 장면을 본 기억이 있는 듯도 한데 역시나 관심 밖 세계일 뿐이다.
인식이 이렇다보니 당연히 워싱턴 D.C.를 여행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넷플릭스의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The Residence)’ 시리즈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시리즈물은 백악관 관저에서 국빈 만찬이 한창이던 때, 시신 한 구가 발견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모든 참석자들과 직원들이 용의자인 가운데 천재 괴짜 탐정이 등장해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8회 동안 단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보니 자칫 늘어질 수도 있으련만 매회 새로운 서사와 반전이 등장해 보는 내내 새롭고 흥미로웠다. 특히 각기 다른 컨셉과 색상으로 장식된 백악관의 방들이 매 회 상세하게 등장해 자연스럽게 백악관을 향한 관심까지 함께 높아졌다.
백악관엔 정말 블루룸, 레드룸, 그린룸 등 한 색상을 테마로 만든 방들이 있을까? 유럽의 사교파티처럼 다같이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그리고 주인공 코델리아가 끝없이 탐조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새들이 서식하고 있을까?
궁금증을 풀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워싱턴 D.C.로, 그리고 백악관으로 가보자
국빈도, 중요 인물도 아닌 내가 백악관에 입장할 수 있는 방법은 투어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을 위한 백악관 투어도 실제로 성사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백악관 투어는 무조건 미국 상하원 의원을 통해서만 신청할 수 있다. 내 경우엔 1년살기를 하고 있던 조지아주 해당 지역의 우편번호로 상원의원 2명과 하원의원 1명을 찾았다. 그 후 세 명의 의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각기 다른 신청 폼에 맞춰서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투어 신청을 했다.
이 모든건 내가 원하는 방문 일정의 7일~3개월 전에 해야 한다. 확신의 J인 나는 당연히 3개월보다 훨씬 이전에 신청을 완료했다. 그 후엔 기다림의 시간이다. 의원실에서 제대로 내 신청을 백악관에 접수해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깜빡하고 빼먹을 수도 있다. 거기에 백악관에서 투어를 닫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거부할 수도 있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두 의원실에서 90일 전에 맞춰서 백악관에 신청을 접수해줘 투어 예약에 성공했다. 한국 청와대 투어도 못 해본 내가 백악관에 가게 되다니. 이왕 이렇게 된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만나볼 수 있으려나.
백악관 예약을 당당하게 성공한 뒤 90일이 지나 방문한 워싱턴 D.C.는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여행 둘째날 아침 예정된 백악관 투어에 앞서 첫째날엔 나머지 명소들을 모두 둘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나마 저렴한 편이어서 예약한 호텔은 역시 가격에 맞게 형편 없었고 의회의사당 투어는 도착해보니 전혀 다른 날짜로 예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행히 의회의사당은 현장에서 즉석 투어 신청이 가능해 무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본격적인 고난은 그 다음부터였다. 의회의사당에서 나와 다음 코스인 워싱턴 기념탑까지 버스를 타면 40분이 걸리는데 그 중 무려 35분이 걷는 시간으로 나왔다. 그냥 걸어가면 42분이 소요되는데? 버스를 타고 35분을 걸어야 한다고? 이러나 저러나 비슷한 것 같아 일직선으로 걷기 시작했다.
워싱턴 D.C.의 햇볕은 뜨겁다 못해 따갑기 시작했고 당연히도 목이 타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 앞에 보이는 푸드트럭으로 돌진했다. 아이스크림과 스무디, 쥬스 중에서 망고스무디 한 잔을 생명수로 선택해 카드를 건넸다. 망고 향만 들어가도 과연 망고스무디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맛이었지만 액체가 몸 내부의 장기를 적셔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열심히 앞으로 걸으며 스무디를 다 마신 뒤에야 문득 가격이 얼마였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무려 16.5달러(약 2만 3,000원).
“6.5달러를 잘못 본거 아니야?”
아니었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망고스무디를 2만원도 넘는 가격에 마시다니. 그와중에 16달러면 16달러고 17달러면 17달러지 0.5달러는 무슨 의도람?
나중에 알고보니 워싱턴 D.C. 푸드트럭에서 카드로 결제하면 이런 바가지 요금을 뒤집어 쓸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미리 알았어도 음료가 간절했던 그 순간엔 또 다시 당했을 것 같긴 하다. 가격을 물어보지 않은 내 탓이요 하는 수밖에.
어쨌든 워싱턴 기념탑의 거대한 위용을 눈 앞에서 구경하고 다시 20분을 더 걸어 링컨 기념관도 구경했다. 그 사이 콜라를 이번에는 10달러를 주고 사마셨다. 무더위와 끝도 없는 도보 이동의 조합 앞에선 콜라 가격이 비싼지 적정한지 따지는 것도 아무 의미 없었다.
다음 날 워싱턴 D.C. 여행의 핵심, 백악관 투어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서둘렀다. 투어 예약 여부를 확인하는 1차 검사를 거쳐 실제 투어 공간인 이스트 윙(East Wing)으로 입장하기까지 무려 다섯 번에 걸친 검사가 진행됐다. ‘그래 총기 사건도 많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백악관에 들어가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라고 생각하며 기꺼이 모든 검사에 응했다.
백악관 투어는 따로 가이드나 그룹이 있다기보다는 개별 방문자가 정해진 동선을 따라 알아서 둘러보는 방식이다. 주요 장소마다 내부 직원이 상주하며 간단한 설명을 하기도, 질문에 답을 해주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백악관의 내부 모습은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을까? 놀랍게도 정말 비슷했다. 레드룸은 방 전체의 벽과 주요 가구가 붉은색으로, 그린룸은 초록색으로 장식돼있었다.
‘그렇게 사건현장이 되어 버렸다’ 주인공이 망원경으로 각종 새를 관찰하던 백악관 앞 정원은 가볼 수 없었지만 각종 꽃이 흐드러지게 핀 ‘재클린 케네디 가든’도 건물 내부에서 창문에 코를 바짝 대고 바라봤다. 전세계 정치, 외교의 핵심에 서 있다는 자각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의 배경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더 강렬하게 휘몰아쳤다…고 생각했다. 그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약 한시간여의 투어를 마치고 건물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내부에 서로 마주보고 걸려있는 거대한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며 서 있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벽에는 후보 유세 당시 피격 당했던 순간을 담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림이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쥔 역동적인 모습, 새파란 하늘에 붉은색 피와 성조기까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사진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로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나르시시스트같은 모습에 헛웃음이, 그 다음엔 이 구도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일까 고민이 들었다. 이전과는 구별되는 강하고 역동적인 미국을 보여주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일까. 그저 피격 순간이 하나의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에 남겨놓은 것일까.
이유가 어쨌든 기괴하고 특이하다. 또 다음 대통령의 시대가 도래하면 이 구도가 어떻게 바뀔지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다음에 백악관에 한 번 더 가봐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