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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마지막은 뉴욕

뉴욕(New York), 뉴욕주

by 고라니

뉴욕은 특별한 도시다. 일단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이며 경제, 금융, 외교, 문화까지 웬만한 분야의 중심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온갖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으로는 또 어찌나 자주 등장하는지. 고전 중의 고전 ‘티파니에서 아침을’부터 여전히 크리스마스마다 즐겨보는 ‘나홀로 집에2’, 아직도 열렬히 사랑하는 ‘프렌즈’, 뉴요커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던 ‘섹스 앤 더 시티’까지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이와 반대로 나에게 뉴욕은 왠지 가보고 싶지 않은 도시다. 너무 대단한 도시이다보니 이 곳에 가면 왠지 압도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1년 살기를 했던 조지아주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거리에 불과한데도 뉴욕 여행을 뒤로 미루고 또 미뤘다.


하지만 무언가 꺼려지는 이 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여행을 아예 안 갈 수는 없었다. 그게 바로 뉴욕의 힘인 것 같다. 원하는 사람도, 원하지 않는 사람도 강한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힘.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여행을 미루다가 미국 생활의 마침표를 뉴욕에서 찍기로 했다. (물론 뉴욕에 가기로 결정하고 난 뒤 혼자 신나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과 영화를 보며 한동안 소란을 떨어댔다.)


원하는게 뭐든 전부 다 있을지어다


뉴욕 여행 준비를 시작하니 다른 도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 여실히 느껴졌다. 뉴욕은 모든 여행 스타일을 다 품을 수 있는 도시다.


미식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한국에서 맛있는 음식들이 서울로 모이는 것처럼 전세계 각종 음식은 뉴욕으로 모인다. 문화 예술을 사랑한다고? 훌륭한 미술관과 박물관은 물론이고 수준 높은 뮤지컬도 감상할 수 있다. 자연환경을 즐기고 싶을 땐? 미국 곳곳에 수많은 주립공원과 트레일이 많은 만큼 뉴욕 인근에도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하이킹 코스들이 있다. 그렇다면 패션은? 또 음악은? 패션 업계를 보여주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배경이 괜히 뉴욕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재즈 클럽들이 모여 있는 곳 역시 뉴욕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열거해도 이 정도라니. 뉴욕 일정을 더 길게 잡지 않은 스스로를 타박하며 3박 4일 짧은 일정 중 가야할 장소와 다음 여행으로 미뤄도 되는 곳을 하나씩 구분했다.


tempImageOssdXH.heic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기 위해 아침부터 소란을 떨며 오픈런을 했는데도 줄이 길더라


일단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방문 1순위다. 사실 예전 뉴욕 출장 때 한 시간 정도 짬을 내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급하게 둘러본 적이 있다. 너무 서둘러서 돌아다니다보니 규모에 비해 큰 인상은 남지 않은 곳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나중에 읽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저서는 이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이 책은 미국의 유명 잡지 ‘뉴요커’에 다니던 저자가 형의 죽음을 마주한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보낸 10년간의 여정이 담겨 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고 난 후에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관심이 별로 생기지 않는다? 감히 예상하건데 공감 지수가 현저하게 낮을 가능성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 빛을 발하는 예술품들 사이에서 방심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살피는 경비원의 삶처럼 말이다.”


이런 문장들이 책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 어떻게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찾은 내 인생 두 번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더 방대했고 더 새로웠으며 무엇보다 더 친밀했다.


tempImageDo0dWc.heic 시트콤 '프렌즈' 오프팅에 나오는 분수라고 하길래 열심히 찾아가봤는데 이 분수가 아니더라 이를 어쩌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향한 관심이 책에서 시작됐다면 센트럴파크에 대한 호기심은 미드에서 비롯됐다. 지금이야 K팝, K드라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라지만 예전엔 시트콤 프렌즈를 비롯한 수많은 미드가 나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의 눈빛을 반짝거리게 했는지 모른다. “딴 따라라 딴따따 따다~” 음악과 함께 센트럴파크 분수에서 웃고 즐기는 프렌즈 주인공들의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왜 미드 속 뉴요커들이 점심을 먹거나 개 산책을 시키거나 심지어 접선하는 공간은 꼭 센트럴파크인건지도 정말 궁금했다.


엄청나게 거대한 여의도 공원 느낌이 아닐까 생각하며 방문한 센트럴파크는 실은 그 이상이었다. 비틀즈 멤버 존 레논의 추모 공간 ‘스트로베리 필즈’에선 사람들이 공원 벤치에 앉아 끊임없이 비틀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조깅을 하는 사람, 책을 읽다가 잠든 사람,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이 곳은 뉴요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공간이라는 점이 느껴졌다.


왜 수많은 미드에서 센트럴파크가 반드시 등장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익숙한 삶의 일부분을 굳이 빼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tempImageowyE8w.heic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들로 북적여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려버렸다.

여행의 마지막 장을 닫으며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가장 자주 찾은 곳은 타임스퀘어였다. 뉴욕의 중심이어서 그런지 그 유명한 뉴욕 스테이크를 먹으러 갈 때도,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러 갈 때도, 쇼핑을 할 때도 타임스퀘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말은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타임스퀘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보고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복잡 다단한 사람들이 이 곳의 활기를, 열기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하지만 귀가 멍해지고 눈이 빙글 빙글 돌아서 30분 이상은 못 있겠더라.)


미국에서 1년 살이를 하는 동안(그러니까 조지아주에서 지내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곳곳을 여행 다니는 동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어 버렸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어느날 갑자기 이민자의 집을 단속해 구금시켰다더라, 멀쩡히 학교를 다니고 있던 유학생을 추방시켰다더라, 과속 딱지를 뗐을 뿐인데 범죄자로 추방 대상이 됐다더라 등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러 문화가 부딪히고 섞여들면서 지금의 미국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혁신과 성장의 배경에 수많은 이민자들의 기여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명제다.


앞으로의 미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까. 10년 뒤 타임스퀘어를 다시 찾는다면 과연 지금처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을까. 씁쓸한 뒷맛을 남기며 미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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